날이 부쩍 추워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더웠던 여름을 지나. 가디건의 계절, 가을이 돌아왔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바람이 솔솔 부는 가을이 제일 좋다. 가을이 되면 여름에는 하지 않았던 일정들을 꺼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을만 되면 역마살 도진 것처럼 돌아다니는 나를 보면서 남편은 나를 '가을여자'라고 부르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지난 주말에도 훌쩍 떠나고 싶어서 여행지를 찾던 중에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잘 지내지? 요즘에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 이제 가을인 것 같아. 아빠가 너네 먹으라고 대하 사놨는데 언제 한번 먹으러 와. 주말 중에 오면 좋겠다."
갑작스러운 시어머니의 전화에 나는 가려던 일정을 취소하고 주말에 시댁으로 향하게 되었다.
우리 집과 시댁은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나는 어렸을 때 가족 여행을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남편은 낚시와 여행을 좋아하는 아버님 덕에 어렸을 때부터 주말만 되면 산이나 바다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한다. 시부모님의 이러한 성향은 지금도 여전해서 자식들이 함께 가지 않더라도 어머님은 한 달에 여러 번 어디든 여행을 다니시는 분이다.
아버님은 겉으로는 무뚝뚝하시지만 속은 굉장히 따뜻한 분이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시부모님과 밥을 먹는 자리에서 아버님이 며느리에게 술잔을 내밀었고 나는 예의상 몇 번 함께 술을 따르고 마셔드렸었다. 어머니나 아들들은 아버님이 술을 드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아버님은 늘 혼자 술을 드시기 일쑤였다. 그런데 며느리가 술을 따라 드리니 아버님은 그게 퍽 좋으셨던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로 아버님은 나만 보면 술잔을 권했고, 나는 시댁에서 아버님의 유일한 술상대가 되었다.
어머님께 대하를 사놨다고 집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는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며느리 이번에도 아버님 술상대 해드려야겠네" 얄밉게 말하는 남편이 미웠지만, 오랜만에 시댁에 가는데 아버님을 위해서 한두 잔 기분 맞춰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주말이 되었고, 우리는 시댁에 방문을 했다. 시부모님은 우리가 오자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주시고는 음식을 먹을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큰상을 펴고 박스 안에 있는 싱싱한 대하를 꺼내보았다. 가스버너 위에 굵은소금이 가득 들어간 팬을 준비했다. 팬이 달궈지면 그 위에 대하를 하나씩 올렸다. 처음에는 회색 빛을 띠던 녀석들이 열이 가해지니 몸을 잔뜩 움츠리면서 내가 아는 맛있는 주황빛의 대하로 변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녀석을 먹는 것은 나름 정교한 작업을 요하는 일이었다. 머리를 떼고 등 껍질을 하나씩 떼어서 다리마저 제거하면 맛있는 대하의 순살이 드러났다. 천천히 대하를 까서 먹으려는데 아버님이 미리 까 놓은 대하를 하나를 내 접시 위에 살포시 올려주셨다. 그리고 뒤이어 어머님도 많이 먹으라며 까 놓은 것을 주셨다. 내 접시에는 남편이 까준 것을 포함하여 시부모님이 까주신 대하로 채워졌다.
우리 친정은 다섯 식구여서 다 같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서로 경쟁하듯이 먹기 바쁜 집안이다. 그런데 시댁에서 이렇게 나 혼자 대하 사랑을 받고 있노라니 오랜만에 막내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당신 먹기도 바쁠 텐데 아들과 며느리에게 대하를 발라주는 기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 해졌다.
살이 오를 대로 오른 대하를 한입에 가득 넣으니 행복이 입안에 가득 찼다. 다 같이 한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나누니 가족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해산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대하만큼은 많이 먹을 수 있었다. 기분이 좋으신 아버님은 수줍게 나에게 술잔을 권했고 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술을 주고받았다.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으며 얼큰하게 취하신 아버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음에는 날이 더 추워지면 그때는 홍게 먹자. 아빠가 주문해서 택배로 받아놓을게. 그때 또와.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