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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 클레어 Oct 21. 2023

비움과 채움의 경계 너머

「싯다르타」ㅣ 헤르만 헤세ㅣ 문학동네 

 


 순종하는 자 브라만에게서 태어난 '의심'은 자신을 구원할 스승을 택하고 향하고 떠나기를 반복하며, 마침내 절망하는 자 고빈다의 '미소'로 피어났다. '신을 경외하며 도덕에 귀의한 브라만에게 고유한 인격의 원천, 아트만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삶으로써 구도하는 자, 싯다르타 여정은 이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브라만과 아트만이 공존하는 절대적 완전, '옴'을 갈구하던 그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몸이 따르는 자였다. 이 철저하고 꾸준한, 좌절 없는 운동 에너지는 그를 고행과 각성과 욕망과 타락과 초탈과 미련의 수레바퀴 너머 '空'이라는 단 하나의 세계로 이끌었다. 브라만을 위해 쫓았던, 아트만을 바라 좇던 자아에게서 비로소 자유로워진 찰나, 온전히 비웠기에 끊임없이 채워지는 강물처럼 싯다르타는 고빈다를 가득 품을 수 있었다. 그 포옹의 이름은 사랑이었다.


 강물이 되기 전, 지독히도 성실하게 조급했던 싯다르타에게서 두 모습의 나를 발견했다. 먼저, 내 삶은 내 선택의 아카이빙일 것이라는 오만과 착각에 사로잡힌 내가 있었다. 분명 싯다르타는 어느 순간마다 다른 배움의 대상을 택하고 그를 향해 스스로 나아갔지만 그 여정엔 예상치 못한 '변수', 카마스바미와 아들, 반복된 고빈다와의 조우도 있었다. 결국 내가 쥐고 있는 것은 내 육신의 운전대일 뿐이다. 내가 달리고 싶은 길 위엔 별안간 끼어드는 누군가와, 경적을 울리며 재촉하는 어떤 이와, 심지어 차선을 이탈한 무법자도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각자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일까. 어쩌면 이 모든 변수들은 우주 속의 각자들이 브라만이었다가 아트만인 순간들의 무수한 교차에 기인한 나비효과일까. 때론 사무치게 빈곤했던 지난날들도 내 선택만은 아니었음을 떠올려본다.


 오롯이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의 양과 질을 높여가며 열심히 살고 있음에 뿌듯해하던 날이 내게도 있었다. 다이어리 속 동그라미와 밑줄로 붙잡은 숫자는 영영 나의 소유가 될 것 같았다. 그런 내 어깨를 강물이 된 싯다르타가 두드리며 속삭였다. '이봐, 시간은 존재하지 않아.' 내가 노력하기만 하면,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산이었던 '시간'은 이제 없다.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하는 강물을 닮은, 현재만이 있을 뿐. 그와 하나로 이어진 과거와 미래를 애써 구분 짓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강물은 그저 부단히 흐르며 노래할 뿐이다. 그렇다면 싯다르타가 다다르기 원했던 '옴'은 정녕 브라만과 아트만의 공존일까. 그것은 공존이면서 공존이 아닐 것이다. 개인의 이기심을 통제하는 브라만의 수련, 자아의 고유함을 깨닫는 아트만의 회복 그 너머는 이미 두 이름을 초월한 단 하나이며 다면적인 n차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싯다르타가 당도한 최후 세계의 이름은 '空'이다. 과연 끊임없이 배고프고 졸리고 그러나 고민하며 키보드를 누르는 '나'란 의식의 끝은 공기 중의 분자일까. 비워져야 채워질 텐데 여전히 나는 '옴'의 순간이 버겁고 두렵다. 정든 물성을 탈피하고 소멸의 공포를 극복할 힘은,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혹시 '옴'으로의 순서를 호도하고 있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비워졌기에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채우기 위해 비워지는 것인지 말이다. 진실로 강렬하게 누군가, 무언가 채우고 싶다면 끝내 비워질 결심이 가능할 수 있을까. 만약 내게 채워진 대상의 빈자리에 다시 내가 채워진다면 그 누구도 사라지는 건 아닌 걸까. 설령 비움과 채움의 엇갈림으로 끝내 우주를 부유할지라도, 이 모호한 경계를 뛰어넘으려는 극단의 추구는 생에 한 번쯤 필요한 일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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