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캥거루의 뛰다가 생각했어 02.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얼마 전 아이가 내게 던진 말과 눈빛, 태도에서
그분이 오신 것을 알았다.
워낙 어려서부터 자기주장이 강하고
표현이 큰 아이라
사춘기가 와도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내심 기대 아닌 기대를 해왔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사춘기의 첫 장이 펼쳐지자
아, 역시 사춘기는 만만치 않구나, 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아, 너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구나.
머릿속은 이미 복잡했다.
흔들리는 동공을 부여잡으며
다음엔 무어라 말할 것인가,
어떤 눈빛과 태도로 아이를 대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동안에도
아이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순식간에 타오르는 두 개의 불꽃같은
나와 아이는 쉽게 타오르는 만큼
쉽게 꺼지지만
맞붙으면 폭발할지도 모르는 화력을 지녔다.
별 수 없었다.
이제 아이가 사춘기의 초입에 들어섰음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한발 물러서는 수밖에.
무엇보다 학원 가기 불과 십여 분 전에
다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위 선배 엄마들로부터 사춘기 아이란
그저 학교에 가기만 해도 고마운 존재이며,
사춘기 시기에는
대화의 첫머리부터 전운이 풍기니
엄마가 잔소리를 하고 싶어도
일단 최대한 참아야 한다고 들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접한 내용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아들이 거실 TV을 주먹으로 쳐
거실이 무지개색 모니터를 전시한
백남준 아트 센터가 되었다는 글부터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릴 때
방에서 나오지 않는 사춘기 딸만
코로나를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에피소드의 디테일만 다를 뿐
큰 맥락은 비슷했다.
이제 나와 아이도 그렇게 무시무시한
사춘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인가
내심 긴장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사춘기가
나의 PMS(월경전증후군)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인가 월경 10일 전쯤부터
감정 기복이 심해졌던 적이 있다.
지금은 운동 덕분인지
식탐 말고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데
그때는 스스로 변화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이 제법 드라마틱하게 변하곤 했기에,
가족들에게 괜히 짜증 내지 않도록
미리 마카롱 12개 세트를 사두고
월경을 맞이했었다.
나는 월경을 원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짜증을 내고 싶지도 않았지만
호르몬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고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곤 했다.
짜증이 날 때마다,
짜증이 나는 스스로에게 더 짜증이 나는
그런 짜증 나는 상황.
사춘기도 그렇다.
아이는 사춘기를 원한 적이 없다.
사춘기는 아이의 자그마한 머릿속
두뇌가 성장하며 생기는 변화가
아이의 자기 조절력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신호이다.
그리고 아이는 이러한 자신의 변화에
버티기도 하고 수긍하기도 하며
그저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곱씹고 되뇌었다.
PMS로 인해 가족에게 짜증을 내던 내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았듯 나에게 짜증 내듯 말한
아이의 마음도 절대 안녕하지 않았겠구나,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그랬듯 아이에게도
사춘기를 부드럽게 맞이할 수 있는
나의 마카롱과 같은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도.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를
여느 때와 같이 끌어안았다.
우리는 다투고 나면 종종
푹신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가만히 서로를 안아주고는 한다.
하지만 이날은 거실 바닥에 앉아
두 팔을 크게 벌려 아기를 안듯
둥글게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내 마음을 전했다.
네가 사실은
엄마에게 그렇게 짜증 내며 말하고 싶지
않았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고.
사실은 넌 소중한 엄마에게
예쁘게 말하고 싶었을 거라고.
그런데 잘되지 않아서
스스로도 속상했을 거라고.
아이는 내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얼굴을 부비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걸 잘 알면서도
마음이 속상했어.
다른 사람들이 엄마에게 뭐라고 하든
엄마에게 소중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말 같은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아.
그런데 너는 엄마에게 정말이지 소중한 존재라서
너의 말은 엄마에게 참 중요해.
네가 하는 말에 행복할 때가 훨씬 더 많은데
아까는 마음이 좀 많이 아팠어.
어렵겠지만 우리 같이 서로에게
더 다정하게 말하도록 노력해 볼까?
우리는 아직
본격적인 사춘기를 맞이한 것이 아니며
아이에게 딱 맞는 사춘기용 마카롱이 무엇인지도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내 곁에 꼭 붙어있던
이 사랑스러운 우주와 이별할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에게 아이는 어린아이인 동시에
나의 부모보다 더 큰 사랑을 준 존재이기에
이것이
기쁘거나 뿌듯해야 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나는 또 철없이 심장이 콕하고 아파왔다.
사춘기가 왔다는 건
이제 너의 독립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
몸이 자라듯
너의 마음이 쑥쑥 자라고 있다는 의미.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나도
너에게서 독립해야 한다는 뜻이겠지.
네가 몸과 마음 건강하게 둥지를 떠날 수 있도록
엄마가 너의 마카롱도 되어 주고,
핫팩도 되어 줄게.
너의 긴 인생 속 사춘기 페이지에
엄마가 너와 ‘싸운 사람’이 아니라
네가 ‘쉴 수 있는 사람’으로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는 일기를 쓰듯 조용하지만 강하게
내가 바라는 사춘기형 엄마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겼다.
▶ <포포포매거진>이 발행하는 뉴스레터 'pausing by popopo(포, 포포포)'에 게재된 글을 좀 더 손질하고 서툰 그림을 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