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만드는 일상
즉흥적인 것도 좋아하지만 나는 계획적인 인간에 가깝다. 일상의 여러 단면들에서 나타난다. 가령 플래너를 집에 두고 나온 날은 속옷을 안 입은 것 마냥 허전하고, 마음이 어수선할 땐 계획을 세우면 (설령 지키지 못할지라도) 괜찮아진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비슷하게 사는 줄 알았다. 신혼여행으로 떠난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 ‘자, 앞으로 우리가 꾸려갈 가정에 대해 얘기해보자’는 내 말에 진심으로 황당해하는 남편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 그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으니 또한 계획할 수 없다는 주의였다.
결혼 5년 차인 지금까지 나는 남편과 ‘앞으로 꾸려갈 가정’에 관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다만 내 방식대로 계획적인 삶을 이어간다. 그는 그고, 나는 나니까. 서로를 신기해하며 서로의 스타일을 존중해가며 산다. 나는 그에게 계획을 강요하지 않고, 그는 연말이 되면 이듬해 내가 쓸 플래너 속지를 무심하게 계산해준다. 주문한 플래너가 도착하면 나는 나의 사명과 가치와 비전을 첫 장에 기입하고, 그해 이루고픈 일을 열 가지 정도 적는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반드시 이루겠다는 결의라기보다 그저 그 작업만으로도 최고의 해가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들어서다. 그러고는 먼슬리와 데일리에 스케줄을 적고 체크하는 용도로 활용한다.
오늘자 할 일엔 이런 것들이 적혀 있다. 브런치에 글 한 편 써서 올리기, 주말 라디오 퀴즈 코너 원고 쓰기, 다음 주 화요일 발행될 코칭펌 뉴스레터 제작 의뢰하기, 코칭펌 보도자료 초안 작성하기… 몇몇에는 취소선이 그어져 있으니 완료했다는 의미다. 줄을 좍좍 그을 때 느끼는 희열감과 해방감이 있다. 이 맛 때문에라도 나는 영원히 디지털로 옮겨가지 못할 것 같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나를 방송국도 클라이언트 업체들도 ‘작가’라 부르지만 실상 글 쓰는 일보다는 챙겨야 할 크고 작은 소통들이 많다. 플래너가 없다면, 기록해두지 않는다면, 여기저기서 구멍이 나기 십상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얼마 전 즐겨 찾는 인터넷 사이트에 작가 마스다 미리의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다. 그녀의 작품은 물 같다. 자극적인 맛도 뚜렷한 색채도 없다. 너무나 평범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들인데 읽다 보면 어느새 갈증이 사라진다. 그래서 삶이 맵고 짜고 쓸 때면 어김없이 책장에서 그녀의 책을 꺼내 들게 된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아무래도 싫은 사람>, <여전히 두근거리는 중>, <차의 시간> 등등 여러 권이 꽂혀 있으니 고르다 말고 돌아서는 일도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마스다 미리는 ‘다작 작가’로 유명한데 기사에는 ‘다작을 할 수 있는 힘’에 대해서도 묻고 있었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카페에서 느긋하게 있기도 하고. 저는 이런 시간도 스케줄에 넣습니다.”
쉬는 시간도 스케줄이라니. 휴식의 유익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얼마간 관념적이었다. 한때 회자되던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는 광고 카피를 나도 수차례 인용해 썼지만 괄호 열고 ‘가능하면, 웬만하면’ 괄호 닫고, 하는 의도가 컸다. 근데 저 문장을 읽는 순간 쉼에 대해 명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원고 쓰고 거래처와 통화하듯 동네 한 바퀴 산책하고 카페에서 느긋하게 쉬는 것도 하나의 스케줄로 여겨야 한다. 실체가 없다 보니 매번 다른 일들에 치이고 밀려 작아지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엄연히 스케줄로 대접해 시간을 들이고, 쉰 다음엔 취소선을 좍좍 긋고, 그 힘으로 다시 일하고. 그래야 하는 건데!
쉴 시간이 없다고들 한다. 어쩌다 시간이 나도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른다고들 한다. 그럼 이렇게 해보자. 24시간이 모자라도록 일이 몰아칠 때 이상하게 하고 싶어 지는 ‘딴짓’이 있다. 나는 마감이 닥치면, 그래서 꼼짝없이 책상 앞에 붙어있어야 하는 날이면,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시장 보기가 그렇게 하고 싶다. 마트가 아니라 반드시 시장이어야 한다. 상인들의 고성이 오가고 사람들로 북적북적하고 마구 돈 써도 돈 버는 느낌이 들어야 하니까. 그래서 내일자 플래너 빈칸에다 이렇게 적었다. 시장가기. 우선순위 A1. 게다가 내일은 17일, 마침 제주시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다. 얏호! 계획만 했을 뿐인데 나는 또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