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봉사차원에서 눈이 쌓인 거리를
회사원들이 쓸고 있는데
아이의 손을 잡고
지나가던 사람이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청소하면서 살아야한다고)
아들에게 교훈이랍시고 말했단다.
로마를 여행하면서
가이드하는 사람을 통해
쿠팡의 새벽배송에 대해
그 신속한 편리함을
현지인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가이드를 통해
전달받은 말은
그렇다면 노동자는
충분한 보상을 받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휴머니티 관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이 아닌 생산현장에 교대근무자로
살아가면서
영어원서를 들고 다닌 적이 있다.
일종의 보상심리라고 할까?
아니면 비록 대학은 못다니지만
원서를 읽을 줄 안다는 위안이었을까?
지금도 스트레스가 많은 날에는
밤새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근무를 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힘든 노동을 하면서
우리는 서로 연대하지도 못했다.
충분하지 않은 보상도 억울한데
세상은 우리를 노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았다.
미래에 대한 과대망상과 차별의
소프트웨어는 업데이트되지 못한 상태에서
힘든 노동을 스스로 경시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의 연대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자기혐오도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많은 이들이 육체노동자로 살아간다.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은 존중받아야한다.
우리는 언제라도 평범한 직장에서
을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차별의 소프트웨어가 직업 간의
임금 격차를 높이지 못하고
다시 차별을 강화하는
세상에 대해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