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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 May 10. 2021

13.

달력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란 길이 펼쳐졌다. 길은 좁고 어두웠다. 길 양쪽으로 넓은 목초지가 펼쳐졌다. 목초지와 통행로 사이에는 통나무 토막이 세워져 있었는데, 질긴 비닐을 꼬아 만든 로프가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를 이어서 울타리를 만들고 있었다. 고양이는 내 발 옆에서 바람에 일렁이는 그림자처럼 너울대는 꼬리를 치켜 들고 있었다. 

길목 앞에는 수레꾼이 있었다. 나는 길을 건너기 위해서는 수레를 타야 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수레꾼의 수레는 아직 불구덩이에 들어가지 않은 연탄의 색이었다. 수레를 끄는 것은 연탄만큼이나 검은 염소였다. 수레꾼이 끄는 것은 수레도 염소도 아닌 시간이었다. 

나는 얼마의 삯을 내면 나를 달력 너머의 세계로 데려다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수레꾼은 말을 더듬었다. 노, 노, 노. 시간을 끄는 것은 그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가 영어를 하는 줄 알았다. 염소는 풀을 세 번 뜯었다. 뜯은 풀을 먹지 않고 그대로 뱉었다. 배불리 먹는 일은 염소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모두가 본문에 맞게 움직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내게도 책무가 주어졌다. 그것은 인내였다. 그가 곡식의 낟알을 떨어뜨리듯 시간을 끌며 뱉어내는 말을 나는 인내를 붙들고 이어 붙였다. 

“노―잣―돈―을 주―시―오.” 

내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남자친구가 남기고 간 만 원이 전부였다. 나는 그에게 만 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내 손을 탁 쳐서 밀어냈다. 

“금^화^를^주^어^야^지.”

내게 있는 금이라고는 아버지의 금니가 전부였다. 나는 수레꾼에게 금니를 내밀었다. 수레꾼은 손가락으로 굴려 그것을 살펴보고는 입을 크게 벌리고 어금니가 있던 자리에 금니를 박아 넣었다. 

“수레에 타.” 

울타리 사이에 머리를 밀어 넣고 풀을 뜯던 염소가 머리를 빼냈다. 나는 바퀴가 셋인 잿빛 수레에 올라탔다. 고양이도 꼬리를 말고 수레의 갑판에 해당하는 자리에서 가르랑거렸다. 

“토요일로 갈 거지?”

그는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나는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정확하게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가라. 토요일로 가라.”

수레꾼이 염소에게 말하자 염소는 천천히 수레를 밀고 나갔다. 염소는 4분의 3박자에 맞춰 걸었다. 수레꾼은 이따금씩 어금니에 손을 집어넣어 금니가 잘 있는지 흔들어 보았다. 시간을 끄는 것은 더 이상 그의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제 일이 없었다. 그는 졸린 눈치였다. 수레를 향해 흘끔흘끔 눈길을 던졌다. 그는 내게 자리를 조금 비켜 달라고 하고 수레에 올라탔다. 수레꾼이 수레에 올라타자 4분의 3박자에 맞춰 걷던 염소가 이상하다, 다리를 끌며 8분의 12박자로 절름거렸다. 한 번도 그만한 가분수는 되어 본 적 없었다는 듯이 염소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도 절대로 멈춰 서지는 않으며 토요일을 향해 걸었다. 걷는 것은 염소의 일이었다. 수레꾼은 절룩거리는 수레에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잤다. 그의 숨결이 나의 졸음을 부추겼다. 불씨를 부추겨 불을 지피듯이. 옮겨 붙은 졸음은 삽시간에 수마가 되어 나를 뒤덮었다. 나는 잠이 들었다. 피로가 가시는 깨끗한 기쁨을 느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나는 벌써 기뻤다. 

삼일도 채우지 못하는 조의는 고양이의 삶보다도 짧았다. 염소는 배가 고픈지 한 번씩 멈춰 서서 울타리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염소는 힘껏 고개를 아래로 꺾어 울타리 너머의 식물을 꺾어 왔다. 백묘국과 루드베키아가 그의 입속에서 짓이겨지다가, 뱉어졌다. 먹는 것은 그의 일이 아직도 아니었다. 공룡이 쇠비름꽃의 먹이가 되듯이, 풀고사리의 비늘 조각 속에서 공룡의 손톱이 자라고 있을 것이었다. 알고 보면 모든 생일은 누군가의 기일이다. 누군가가 태어났을 것이고, 나는 진작부터 기뻤다.

길은 조금씩 넓어졌고 아침이 되자 차와 오토바이가 다니는 소읍에 다다랐다. 초콜릿 한 조각만큼의 금융시설과 목욕탕 굴뚝이 목을 빼고 주인을 기다리는 개의 모습으로 읍내의 도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운기와 승용차가 다니는 도로는 두루마리 휴지처럼 농경지를 향해 뻗어나갔다.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쓰레기를 무단투기하는 당신이 버리는 것은 양심입니다. 어느 집에선가 소파를 버렸다.

소파는 은행 앞을 덩그러니 지키고 있었다. 기관총을 손에 든 남자 아이 일곱 명이 스펀지가 터져 나온 소파에 앉아 행인과 자동차를 향해 총을 겨눴다. 나는 수레 안에서 고개를 숨겼다. 여자 아이가 총을 든 남자아이들 앞을 지나는 것이 보였다. 여자 아이가 멘 분홍색 가방도 보였다. 네모난 책가방의 아래 네 귀는 모두 터져서 속에 든 것이 삐져나왔다. 교과서, 참고서, 연애소설 한 권이 들여다보였다. 여자 아이는 연애하고 공부하는 공상에 빠지기를 좋아했다. 놀 친구가 없었지만 그를 괴롭히는 친구는 많았다. 하지만 공부는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책은 여자 아이를 해치지 않는 유일한 벗이었다. 탕. 비비탄이 여자 아이의 가방에 맞았다. 탕. 탕. 비비탄이 여자 아이의 가방에 든 책을 맞혔다. 탕. 탕. 탕. 탕탕탕탕. 

남자 아이 하나가 쓰러졌다.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소파 옆에는 총을 든 여자 아이가 서 있었다. 여자 아이의 책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나는 눈물이 흘렀다. 그 여자 아이를 보고 싶었다.

염소에게 소파가 있는 쪽으로 가달라고 말했다. 염소는 물소 통가죽 소파라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저 물소는 이미 죽어서 가죽이 벗겨졌어. 너는 살아있고. 물론 네 가죽은 뼈에 달라붙어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지경이지만, 그래도 너는 살았고 저 물소는 이미 죽었어. 그래, 그렇다면 한번 해 볼 만은 하군. 염소는 소파가 있는 쪽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거역하는 것은 염소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자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뭘?” 그는 나였다.

나는 수치스러워질 필요를 느낀다. 여자 아이의 미래는 여자 아이를 지나 수레를 몰아 도시로 간다. 수레꾼은 이미 깊이 잠들어서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이미 죽었는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는 태어났을 것이기에 나는 꽤 오래 전부터 기뻤다. 마을을 여럿 지나치며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나였다. 나는 숨고 때리고 도망가다 추격했다. 저주하고 축복을 받고 믿음을 져버렸고 원망을 샀다. 나는 대체로 가난한 것이었다. 나는 대체로 저주받은 것이었고 어리거나 청년이었거나 낡은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스물두 살이었다. 

나는 나의 과거를 하나도 바로 잡지 못했다. 고통 받던 나를 하나도 고쳐 주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통은 나와 한 몸을 이뤘다. 여러 날인지 여러 해인지, 몇 시간인지를 지나왔다. 달력 속의 시간은 달력 바깥과 다르게 세어졌다. 이제 염소의 등가죽 위로는 뼈가 슬레이트 지붕처럼 도드라졌다. 염소는 기찻길을 향해 몇 줌 남지 않은 힘을 그러모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박자가 점차 느려졌다. 나는 론도 형식의 미래가 되었다. 기찻길을 넘어가면 강을 낀 도시가 나온다고 했다. 강을 낀 도시를 지나면, 바로 그곳이 토요일. 토요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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