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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 May 10. 2021

12.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내게 큰 오점을 남겼다. 오점으로 인해 나는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커다란 오점들이 팔뚝을 기어 다녔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점을 눌러 가며 선잠을 잤다. 

─철컹철컹.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깼다. 문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분절된 밤이 절지동물이 되어 창을 흔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절지동물의 생김새를 보려고 불을 켰다. 문틈으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은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복도에 난 문이 있고 신발을 두는 곳을 사이에 두고 덧문이 있었다. 덧문의 잠금장치는 쇠로 된 허술한 고리가 전부였다. 바깥에서 흔들자 고리는 삐거덕거리며 빠질락 말락 위태롭게 흔들렸다.

“누구세요?”

내가 묻자 문을 흔들던 사람이 동작을 멈추었다.

“사람 있어요. 누구세요?”

“어? 살았네.”

이어서 바깥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깥문을 단단히 다시 잠그고 싶었지만 덧문 사이에서 숨은 누군가가 덮칠까봐 불을 켠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객실의 벨이 울렸다.

나는 경계하며 전화를 받았다. 

─안 나가세요?

“벌써요?”

─아 그런가.

전화가 끊겼다. 벽면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봤다. 8시 40분이었다. 목덜미가 간질거렸다. 나는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목덜미에서 시작된 간질거림은 어깨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어깨에서 팔뚝을, 팔뚝에서 손목을 나는 차례로 훑었다. 손등까지 기어 내려온 것은 지난밤 남자친구가 내 인생에 남기고 간 오점이었다. 오점은 오백 원짜리 동전만 했다. 나는 왼손으로 오른쪽 손등을 탁 내리쳤다. 오점은 잠시 기절한 듯 움직임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손등을 내리치려는 찰나 오점은 가공할 만한 속도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벌레를 잘 잡지 못한다. 벌레의 움직임, 골격, 형태감 등 생이 뿜어내는 전반의 감각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바닥에 있는 오점을 향해 발바닥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발바닥의 용천혈 부근에 피신한 오점은 내가 발을 떼자  쏜살같이 달아났다. 오점이 달아난 곳은 텔레비전 화면이었다. 지금 잡지 못하면 언젠가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내 오점과 마주해야 할 것이었다. 나는 리모컨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오점은 없었다. 12번. 오점은 없었다. 14번. 홈쇼핑. 15번. 역시 홈쇼핑. 16번. 오점이 귀퉁이에서 달아나는 게 보였다. 얼른 채널을 17번으로 올렸다. 오점이 왼쪽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오점을 잡기 위해 화면을 내리쳤다. 하지만 오점은 어찌나 빠른지 도무지 잡을 수 없었다. 20번. 21번. 24번. ……이윽고 74번에 이르자 바둑채널이 나왔다. 검은 돌 중 하나가 오점일 텐데, 도무지 티가 나지 않았다. 오점을 찾기 위해 지그시 화면을 노려보고 있는데 해설자가 말했다.

─시간 다 되었습니다.

그러자 흰 돌이 하나 판 위에 내려왔다. 하지만 승기는 이미 검은 돌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때 검은 돌 하나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화면에서 사라졌다. 나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다. 딱딱한 보통의 화면이었다. 흰 돌의 승리가 화면에 표시되었다.

─톡톡.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빗줄기는 아니었다. 두꺼운 납빛 커튼을 열었더니 고양이가 있었다. 한족 귀가 잘린 고양이였다. 나는 귀를 긁적이며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그래, 안녕.”

고양이가 대답했다.

“들어가도 될까?”

“되지 그럼.”

나는 창문을 열어 주었다. 고양이가 사뿐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가 아니구.”

고양이는 리모컨을 발로 밀었다. 왼발로 리모컨을 누르고 오른발로 꾹꾹 누르자 채널이 돌아갔다. 고양이에게서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거야.”

heaven이라는 채널이었다.

“너희 아버지가 나오시네.”

아버지는 무성 영화의 배우였다. 

“나한테 참 잘해주셨지.”

고양이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버지는 극중에서 등을 돌리고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푸른 공단 점퍼를 입은 그는 아마도 뱃사공 노조원이거나, 오바사일 것 같았다.

“(아버지. 아버지.)”

나는 소리를 죽여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가 출연 중인 영화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인지 아버지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자꾸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

왜 부르는지는 나도 몰랐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하는 거였다.

“밀고 나가래도.”

아버지가 말을 하자 영화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고양이가 리모컨의 음량을 높이고 있었다. 

“내가 방법을 일러주지.”

고양이는 다시 사뿐 텔레비전 선반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작은 달력에 앞발을 갖다 댔다. 달력에 닿자 발 끝부분이 희미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떼면.”

고양이가 달력 안에 푹 담겼던 발을 빼 내자 발은 다시금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고양이가 짙어진 것 같았다.

“먼저 갈게.”

고양이가 달력에 몸을 밀었다. 고양이가 다시 옅어졌다. 옅어진 고양이는 반죽 같은 달력을 쑤욱 밀고 들어갔다. 달력은 고양이를 한쪽 발을 삼켰다가 몸통의 반을 삼켰다가 꼬리만 남기고 모두 삼켰다가 이윽고 꼬리마저 꿀꺽 해 버렸다. 

“툭툭.”

나는 고양이를 따라 달력을 밀어 봤다. 딱딱한 보통의 달력이었다.

─토요일을 밀고 나가라.

영화 속에서 아버지가 말을 했다. 나는 달력 중에서 토요일을 밀어 보았다. 

물렁.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쑤욱.

손가락이 빠졌다.

손가락이 빠지고 팔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어깨까지 빠졌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객실 안을 둘러보면서.

‘정말 이대로 밀고 나가도 좋은 걸까? 내가 가면 같은 반 아이들이 나를 조금은 불쌍히 여겨줄까?’

나는 도리질을 한다. 혼자만 가는 것이 두려워 나는 가슴에 미련과 불을 하나씩 품는다.

그리하여 미련을 남기지 않고 토요일을 밀고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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