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다시 번역하는 마음

줌파 라히리,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by 쓰리씀

감탄한 그녀

줌파 라히리 Jhumpa Lahiri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창작자가 세 명 있는데, 첫째가 줌파 라히리, 둘째가 가즈오 이시구로, 셋째가 민디 케일링(감탄함 보관 중)이다.

이 셋의 공통점은?

바로 이민자 2세대라는 점이다.

줌파 라히리는 인도 출신 부모 아래 태어난 미국 작가, 민디 케일링은 인도계 미국인 코미디언이자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 출신의 영국 이민자 2세대다.

하지만 내가 이들에게 끌리는 이유는 단순히 이민 2세대라는 정체성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그들이 내면 깊은 곳에 품고 있는 ‘경계적 불안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치 내가 살아오면서 온전히 ‘나’이지도, ‘엄마’이지도, ‘여성’이지도 못했던 불온한 감각과 닮았다고, 동질감을 느끼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들은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외로움과 상처, 어떤 삶에도 완전히 닿지 못한 불안함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만의 언어, 문장, 세계로 너무나도 아름답게 재탄생시켰다.

나의 이민자 2세대에 대한 오랜, 열렬한 감탄은 줌파 라히리부터 시작되었다.


감탄한 이야기

줌파 라히리는 영어로 퓰리처상까지 받은 미국 작가다.

하지만 그녀는 이탈리아어에 사랑을 빠져 이탈리아로 이주한다.

단순히 읽고 쓰는 수준의 학습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흡수하고, 체화하고,

마침내 이탈리아어로만 첫 산문집 In altre Parole(In other words)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까지 썼다.

이 책은 영어로 쓴 글을 번역한 책이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언어로 자기 자신을 재조립한 시도다.

그녀는 이 여정을 “자발적 망명”이라고 했다.

“내 삶과 관계가 없는 언어를 유창하게 말할 방법을 찾고 있노라”라고 선언하는 작가가

그동안 쌓아놓은 모든 권위와 자기 확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 사심 없는 헌신과

그 무모하고도 열정적인 용기에 온 마음을 빼앗겼었다.


잃을 것도 없는데 시작하지 못하는 겁쟁이의 마음과

무언가를 손에 쥐고, 이루고 싶은 세속적인 열망에 휘둘려

늘 마음만 시끄럽던 나에게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파동이었다.


처음 이 책을 읽고,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읽어봐, 네 인생이 쓰레기처럼 느껴질 거야.”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작가의 아름다운 시도가 나의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너무나 선명하게 비추는 느낌.

그렇게 그 감탄은 내 안에 깊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줌파 라히리에 감탄함'을 쓰려고 다시 책을 펼쳤을 때,

노란색 색연필로 밑줄 그어 두었던 문장을 운명처럼 다시 만났다.

“사물에 대해 경이로움과 놀라움을 느끼지 않고는 그 무엇도 창작할 수 없다.”

그 ‘감탄’에 대한 공감은 30대, 미혼이던 시절의 것이었지만,

아이를 키우며 다시 내 언어를 찾고 싶어진 지금 이 순간과 연결되리라는 걸 몰랐지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감탄한 장면

책의 서두에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과정을 호수를 건너는 과정에 비유한다.

“작가는 작은 호수를 건너고 싶다.

호수는 외딴곳에 있고 얼마나 깊은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은 기슭을 따라 빙 둘러 헤엄을 치면서

힘들면 쉬거나 붙잡고 일어서기도 하고,

수영을 하지 않을 때는 호수를 건너는 사람들이 팔을 몇 번 휘저었는지 수를 세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번 건너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150번 저어서 호수 중간에 도착하고 100번을 더 저어 건너편에 도착한다.

호수를 건너자 그녀가 알던 호숫가는 건너편이 된다.”


셋째를 낳고 이번에도 역시 18개월은 일도 쉬고, 사생활도 사라졌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아이를 재우고 난 뒤 내가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하고 가장 많이 한 일은,

갓생 사는 유튜버의 브이로그를 보는 일이었다.

몇 시에 일어나는지, 아침으로는 뭘 먹는지, 일 끝나고 집에 와서는 무슨 자격증 공부를 하는지, 가방에는 뭐가 들었는지.

그들이 호수를 건너는 동안 팔을 몇 번 휘젓는지 세고 나면,

마치 내가 팔을 휘저은 것처럼 피곤했다.


그러다 어느 날, 4시 반에 알람을 세팅하기로 한다.

120번쯤 알람을 끄고 겨우 일어나서 다이어리를 채워갔다.


250번씩 팔을 저어 호수를 건너는 그들처럼

모닝페이지도 써보고, 감사일기도 써보고, 확언도 써 보다

지금은 감탄의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지금 호수 어디까지 와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곳이 호수 건너편이 되어있겠지.


내가 뭐라도 시작했다면 그건 모두 이 책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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