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나 페이 & 에이미 폴러-2011 에미상 시상식
감탄한 그녀 - 티나 페이 & 에이미 폴러(Tina Fey & Amy Poehler)
미국 코미디는 문화와 정서가 워낙 달라서, 시동을 거는 데까지 꽤 오랜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초반의 몇 번의 고비와 좌절만 잘 넘기면, 어느 순간 특유의 유머 호흡에 푹 빠지게 된다.
그 맛을 처음 알게 해 준 시리즈가 바로 <30 Rock>과 <Parks & Recreation>이었다.
덕후의 기질을 숨기지 못하고 작가와 제작자를 파고들다가,
티나 페이와 에이미 폴러의 특별한 우정에도 완전히 매료되었다.
여자 친구들이 의기투합하는 sisterhood 스토리에 마음이 끌리는 내 취향의 시작점에는 바로 이들이 있다.
티나 페이는 <30 Rock>의 크리에이터이자 작가, 배우로 활약하였고, 이전에도 영화 <Mean Girls(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각본을 맡으며 여성 서사를 날카로운 유머로 풀어내는 능력을 일찌감치 보여주었다.
에이미 폴러는 <Parks & Recreation>을 통해 코미디 연기뿐 아니라 제작자로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이 시리즈에는 Vol.1 소피아 코폴라 편에 등장했던 퀸시 존스의 딸, 라시다 존스가 주연으로 출연해, 그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덕질의 우주는 하나다!)
두 사람은 21세기 미국 코미디를 대표하는 여성들이지만, 경쟁 관계가 아니라 오랜 시간 서로를 지지하며 진정한 친구로 함께 성장해 왔다.
SNL에서도 콤비로 오랫동안 활약했고, 골든글로브에서는 총 네 차례나 공동 진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후배 여성 코미디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크리에이터로 성장하는 데에 개척자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서로를 아낌없이 지지하는 모습은 많은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들이 가진 유머의 힘은 개인적 성공을 넘어 여성의 연대와 자기 존엄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감탄한 장면
그 실례가 바로 2011 에미상 시상식이었다.
코미디 시리즈 여우주연상 부문에 <30 rock>과 <parks & Receration>을 포함해 총 여섯 명의 여배우가 후보에 올랐다.
가장 먼저 이름이 호명된 <Parks & Recreation>의 에이미 폴러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대 위로 튀어 올라간다.
분명히 후보 호명인데, 뭐지? 시상인데 내가 잘못 알았나? 어리둥절 한 찰나,
이어서 호명된 멜리사 맥카시 역시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대에 올라간다.
마사 플림턴, 에디 팔코, 티나 페이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환희에 차올라 차례차례 무대로 오른다.
마지막으로 호명된 연기파 배우 로라 리니는, “유머가 뭔지 내가 폼 한번 보여줄게.”하듯, 앞니에 묻은 립스틱을 닦는 시늉을 하며 여유롭게 무대로 걸어 나간다.
당대 최고의 여성 코미디 배우 여섯 명이 무대 위에서 손을 맞잡고 수상 발표를 기다린다.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임에 분명한데, 눈물이 났다.
왜 이러지, 내가 이상한 건가 싶은데, 객석의 돈 치들이 일어나, 감동 어린 눈으로 박수를 쳤다.
이어 현장에 있던 다른 배우들도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는 모습이 카메라에 비쳤다.
그들의 기립 박수는 찬사가 아니라 경의였다.
무대 위의 여배우들이 자랑스럽고, 너무 근사했다.
눈물이 더 쏟아졌다.
감탄한 이야기
5분도 채 되지 않는 이 시상식 퍼포먼스는 티나 페이와 에이미 폴러의 즉흥적인 아이디어로 탄생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에미상 코미디 시리즈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미국의 살벌한 쇼 비즈니스에서 여성 코미디언으로 살아남았고, 이름을 세웠다는,
정말 엄청난 업적을 의미한다.
그녀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수상 여부를 기다리지 않고, 당당하게 무대로 올라가는 모습은 농담이었지만
일종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상을 받든 받지 않든,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을 증명했다.
외부에서 주는 상으로 우리 가치를 평가받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 확신의 순간이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정의하고, 서로를 인정하는 여성들의 존엄한 유머가 빛났다.
“나는 내가 여성 코미디언인 것이 자랑스럽고, 마침 오늘 끝내주는 드레스도 입었어.”
이 퍼포먼스에 기꺼이 의기투합한 여성들의 당당함이 너무도 멋졌다.
수상자가 누구인지가 실로 의미 있지 않았던 해였지만, 2011년의 여우주연상은 멜리사 맥카시가 수상했다.
나는 멜리사 맥카시의 필모그래피를 줄줄 꿰고 있을 만큼 오랫동안 응원해 온 팬으로서
그녀의 수상이 개인적으로도 얼마나 감동적이고 상징적이었는지 모른다.
엄청난 유머감각과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오버 사이즈 여배우로서 주연이 되는 길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수상자가 발표되자, 객석에 있던 동료 여배우가 마치 자신이 수상을 한 것처럼 오열을 한다.
나도 함께 오열했다.
멜리사 맥카시가 그저 운 좋게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게 아니라,
그 오랜 시간을 어떻게 보내왔을지,
말이 필요하지 않은 동료의 인정이었으며, 진심 어린 축하였다.
그녀가 상을 받는 모습도 압권이었다.
어머, 제가 탈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하는 억지 겸손의 모습이 아니라,
“예스, 바로 이맛 아닙니까” 하는 표정이다.
그 시상식 무대는 웃기려고 한 콩트가 결코 아니었다.
경쟁을 초월할 수 있는 자신감 넘치는 여성들이,
그간의 투쟁 혹은 상처의 역사를 무겁지 않게,
오히려 더없이 가볍고 통쾌하게 승화시킨 순간이었다.
무대에 올라갈 자격은 누가 정해 주는 게 아니다.
내가 올라간다.
“나는 (네가 주는)상을 받아야만 올라가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자격이 있으므로,
일단 올라간다.”
그래서 브런치 스토리를 시작하기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허락받기를 기다리기 전에 일단 올라가기 위해서.
(유튜브에서 2011 emmys best actress comedy를 검색해 보세요!)
함께 쓰고 싶은 감탄노트
나를 움직인 건 나의 확신이 아니라,
누군가의 판단, 누군가의 평가였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아이에 대한 평가마저
나에 대한 평가로 동일시 되었다.
이제는,
그 모든 평가로부터 나를 분리하고 싶다.
나도 일단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