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본.
검은 밤이 깊어가고 추운 계절도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학교 가는 버스 창가에 기대, 부신 햇살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무렵 너는 거기 있었다. 앳된 보이는 눈가에는 호기심이 어려있었고 머리를 묶어 가녀린 목 언저리에 보슬보슬 삐져나온 잔 솜털이 햇빛으로 옷을 입고 하얀 은색으로 청아하게 빛이 났다.
꽃샘추위는 여민 내 옷깃을 훅- 지나고 나를 통과했지만,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바라본 난, 뜨거운 화상을 입었다. 너의 그 모습, 다시 말해 사람의 분위기.
그것은 한달음에 나에게로 다가와 내 두 뺨을 꼬집어 뒤흔들었고, 이내 내 두 볼은 빨갛게 보풀아 올라갔다.
너는 그랬다. 내가 동경하던 그 사람도, 좋아하던 그 배우도, 음색이 아름답던 그 가수도, 그 둘 중 어느 한 사람의 그 어떠한 것도 닮지 않았지만.
너는 그랬다.
부득이하게도 난 너와 이야기한 적이 있다.
너는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너의 머리칼은 바람과 맞잡은 손으로 춤추듯 나풀거리는, 마치 카를로스 카르텔의 por una cabeza의 노래가 어울릴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만들어내는 현악이 내 머릿속에 울렸고, 나는 알 파치노가 연기한 맹인처럼, 너란 빛에 눈을 멀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한철 지나가는 마음이려니 생각했다. 너의 옆엔 누군가 있었고, 그는 널 아끼고 있었으니.
다시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몇 번이고 붙잡았고, 눌러보았다. 하지만 너에게 분한 내 마음은, 성난 말처럼 진정하지 않았다.
매시간, 매번 똑같은 양상이 계속되었다.
문득 외로울 때, 슬플 때가 있었다. 가끔 기분 좋을 때, 기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네가 생각났다.
맛있는 걸 먹을 때 네가 생각났다. 재밌는 걸 봤을 때 네가 생각났다. 눈을 감고 너를 그리라면, 눈썹 하나까지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네가 생각났다. 나는 너라는 화분에 필사적으로 물을 주지 않았지만, 너는 그렇게 메마른 내 마음속에 보란 듯이 피어났다.
그렇게 신록의 계절은 지나가고 만연한 여름이 되었다.
신록의 계절이 지나갔다. 비는 거의 안 내리고 올여름은 무더위가 생길 거라고 뉴스에서는 말했었다. 계절은 자기가 지나간 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는지, 세 살짜리 꼬맹이같이 온 동네를 물감으로 칠하고 다녔다.
봄꽃은 얇게 져며져 토지의 양분이 되었고, 너도 그렇게 내 마음속에 양분이 되었다. 고맙게도 정말 고맙게도, 내가 널 좋아하면서 생긴 버릇은 너를 생각하는 마음을 좀 더 천천히 생각하고 그것을 다시 천천히 표현해 내는 것이었다.
너에게 연락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너와 말하고 싶었고 그렇다고 섣부르게 너에게 연락을 하기엔 내가 너무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너와 굵직한 무언가가 없었는데, 나를 좋게 봐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숫기가 없었나 싶기도 했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벼르고 여며 글로 옮겨 적었다. 적은 것을 하루하루 다시 살펴보면 그날의 감정들이 오늘은 시고 덜 익은 것처럼 보여 고치고 교정했다. 하루를 다 마친 후에 난 힘이 없어서 가라앉고 싶어 진다.
까만 밤이 지나고, 하얀 새벽이 올 때까지 널 생각하게 날 맘대로 둔다. 나는 내방 베란다에 앉아 밖을 보며 너를 그리다 서서히 잠에 들었다.
밤이 오자 점차 비가 거세진다.
분명 여름이 지나가는 소리일 것이라.
창밖은 빗소리로 수놓아져만 가고,
그 빗방울에 나는 점차 물들어간다.
마음은 보였고 햇살만 남은 것 같았는데
그 햇살이 작은 백열전구였던 것 일까,
햇살이라 믿고 있던 전구에게,
꿈뻑꿈뻑 말려달라고 했나 보다.
밝고 싶다.
나는 비로소 너 덕분에 밝아질 것이다.
너를 향한 시상들은 나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운율이었다. 한 자, 한 자, 소리 내어 글을 곱씹었다. 그날 밤도 내 기분에 맞춰 밤은 울고 있었으니까. 몇 번의 비, 한참 동안의 무더위 속에 조금 여유로운 시간이 생겼지만,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너에게 말했다.
너와 함께 하고 싶다고.
너와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한 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는가, 더욱 갑작스레 말한 이유기도 했다. 너에게 마음을 표하고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너무 이기적이었다. 부담감, 불쾌함, 당황스러움, 혼란스러움 등의 감정들이 나와 너 사이를 깊고 두텁게 가로막았다.
똑같은 일상 속이 차라리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이해받을 수 없는 통증이라면, 나 혼자 꾹 참는 것이 나았다. 너와 간혹 같은 공간에 있을 때 나는 너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너는 그럴 때마다 나와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인사를 할 때도 응시하는 눈은 바닥을 쫓아 시선을 피했다.
말을 걸려고 할 수도, 걸 수도 없는 입장. 난 너무 나만을 생각했다.
날 피하는 눈을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아픔보다, 네가 느끼는 감정들이 다 내가 준 것 이어서, 가슴은 찢어졌고 상처가 났다.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 내었다.
비가 오는 아침, 부스스 일어난 흙냄새, 낮은 톤으로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얼그레이 홍차 한 잔, 아무도 없는 밤공기에 홀려 버린 걸까, 손을 뻗어 조금 추워진 밤공기를 손에 쥐어질까, 흐트러진 정신으로 너를 그리다 이윽고 밀려드는 회의감에 너를 지운다.
내 인생을 뒤바꾼 나의 구원자. 너는 그랬다. 글을 쓴다는 것은 너라는 사람을 표현하기엔 너무 벅찼다. 같은 방향으로 걷던 그 길에서 익숙한 외로움과 초라한 내 뒷모습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널 그린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와중에도, 목이 아파 올려다본 천장에 무늬 사이에도. 빛의 잔향이 눈에 새겨 넣은 아름다운 빛무리가 너와 같아 기쁘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이제는 말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말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되려 생각한다. 따듯한 방에 등을 맞붙이고 잠에 들었을까, 친구들과 함께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요 근래 나는 너와 나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많이 마주 한다.
그들은 말한다. "언제 올라와?", "니 얘기야?", "소설이야?"
난 말한다.
"소설이야."
사실 끝내기가 싫다. 소설의 끝은 아무런 말이 없으니까.
너는 봤을까, "나"리는 남자 주인공이 작가가 되어 "너"라는 여자 주인공을 두고 감성에 찌든 말과 구차한 언변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헐벗겨진 이 삼류 소설을, 정작 읽어야 할 독자는 너였었고, 이 소설은 독백으로 쓰이지 않았어야 했었음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모든 상황을 사사로이 생각했었고, 행여 네가 나에게 대답을 하지 못할까, 익명게시판을 통해서도 글을 올려봤다.
하지만 너의 존재라고 여길만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답답했다. 며칠 긴 시간을 정해 시간을 둔다면 조금 마음이 편해질 거라 생각했다.
의식하지 않았다.
의식하려 하면 할수록 정신이 흐려졌기에, 너를 잊기 위해 내 나름대로 다른 짓거리도 많이 해봤다. 술을 먹으면 너에게 연락할 것 같아 꾹 참았다.
수염을 길러봤다. 널 생각하지 않을 땐 계속 기르고, 네가 생각나 메모로 글을 쓰면 그다음 날 아침은 면도를 했다. 최대 9일, 하지만 그 기간도, 너를 잊었다 말하긴 어려웠다.
그제도, 어제, 나는 면도를 했다.
보통날은 하루가 길다.
하지만, 너를 생각하는데 쓰는 내 시간은 항상 하루가 짧고, 모자라다. 난 그렇게 너를 그렸던 화가로 남겨졌다.
P.s: to.unknown
늘 밤하늘엔, 너와 닮은 이쁜 달이 떴다.
오늘 밤하늘의 달은 한결 너와 닮아서 줄곧 눈에 새겼다.
언제든 달을 보거든, 혹여나 이 글을 읽었거든. 연락 기다릴게,
안녕하세요, 작가입니다.
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보통날, 저는 이러한 시기를 슬럼프라고 합니다.
하루하루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글을 옮겨적고 이 글을 썼다가, 다른 글도 만졌다가 하는 터라 그렇게 돼버렸네요, 결국, '작가의 서랍'란엔, 많은 글들이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번에 쓴 글은 "다섯 번으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나"는 여러분이 될 수 도 있습니다. 그것은 소설일 뿐이지만, 마음속 한편에 있던 자기 자신의 첫사랑이고, 짝사랑이고 할 것 없이 느껴진 허무하고 공허했던 마음을 적어놓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이렇게 생각했어요.라는 주인공의 심정을 주인공 입장에서만 내뱉는 '독백'의 구조입니다.
처음 글, 복공증에서 다른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합니다. "대화는 캐치볼이라 생각한다."라고. 저 또한 그렇습니다. 대화는 일방적으로 주는 말이 아니라고, 나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상대를 바꾸어 뒤집어보면, 대답 없는 대화도, 대답을 한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다른 주인공인 "너"또한 여러분이 될 수 있습니다. 가령, 본인이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적이 있을까?라는 주제로 접근을 해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이렇게 생각해주었을까?라는 생각 또한 가지게 될 수 있도록 묘사했지만, 잘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남자 화장실 문구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떠난 사람은 떠나간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말이지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그 사람에게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었을까?라는 물음이 드리워집니다.
기억 저편에서, 떠오르는 감정들을 최대한 붙잡아 글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표현이 부족하고, 글재주도 부족하여 이렇게 마무리로 말씀드립니다.
요사이 무더웠던 여름은 지나가고 쌀쌀한 가을이 다가옵니다. 카페에서도, 집에서도, 차 안에서도. 본인이 좋아하는 책 한 권, 시 한수, 쌉쌀한 노래 한 곡. 여유는 자기가 만들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지친 일상 속, 여유를 찾아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만. 총총.
* 이 글을 쓸 때 나에게 영감을 준 곡들.
한희정 - 우리 처음 만난 날
Carlos Gardel - Por Una Cabeza
한희정 - 드라마
피아노 포엠 -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Miranda Wong - Nocturne in P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