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처럼 따뜻한 폭력
나의 주변에 해맑음의 인물이 있다.
그는 늘 밝고, 사람을 좋아하고, 타인을 칭찬하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그는 누구보다 여유롭고, 원하는 일과 쉼의 균형을
“운이 좋게도” 잘 유지하고 있다.
그의 ‘악의가 없는’ , ‘그럴 의도는 아닌’
일상의 태도는 어느 순간 날 지치게 한다.
나는 왜 그의 해맑음이 불편한지
스스로를 검열한다.
이것은 나의 예민함 인가?
태생이 나는 부정적인 성정인가?
그의 여유로움에 대한 시기심인가?
그와 나의 사회적 지능의 차이일까?
도덕적 감수성의 차이일까?
그의 해맑음은 진심일까?
무심함의 다른 이름일까?
자신의 선의와 무지함이 타인에게 불공평이나 고통을
야기하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폭력이 아닐까?
더 잔인한 것은 이 폭력이 칼날처럼 날카롭지 않고
햇빛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저 사람을 좋아하는’ 그의 내면 속에서 타인의 현실은 지워지고
그의 해맑음은 도덕적 무지함의 면죄부로 작동한다.
그가 무심히 누리는 여유 뒤에는
그 자리를 비워준 누군가의 배려가 깔려 있다.
그는 여전히 친절하게 웃으며 배려받았음을 감사하고
미안한 감정도 표현하며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지만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구조를 선택한다.
해맑은 그는 끝까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 믿는다.
얼마 전 ‘폭력의 유산’이라는 벽돌책을 읽으며
해맑은 자들에 대한 글이 쓰고 싶었다.
영국이 인도 문화를 찬미하며 그 땅을 지배했듯이
그는 동료를 좋아한다면서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그는 착취를 인식하지 못한다.
문명화된 존재로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 믿으며
타인의 자원을 약탈하는 것은 아닐까?
그가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관계가 자신에게 주는
편의와 안락 때문이 아닐까?
그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지만
그 관계에서 늘 주도권과 이익을 챙기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자신이 주는 상처조차 별일 아닌 것으로 여기는
무지와 낙관의 혼합체.
이제는 부정적인 사람에게 더 끌리게 될 것 같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이 어둡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