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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 Sep 10. 2024

대통령이 됐을 거야_3

위대한 유산

소년은 부잣집 도령이었다.

아마도 귀한 아이였을 것이다.

누가 지었는지 전해 듣지는 못했지만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높은 곳의 빛나는 별.

집안의 장자였던 그에 대한 사랑과 기대를 담은 작명이었으리라.


곱게 바느질된 옷을 입고 폴짝폴짝 뛰던 소년은 늘 진탕에 옷을 더럽히곤 했다.

하지만 문제없었다. 집에 돌아가면 늘 말끔한 새 옷으로 갈아입혀졌다.


짧은 시간이었다.

소년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평화로운 시간.


언젠가부터 아무도 깨끗한 옷을 갈아입혀주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끼니 걱정을 해주지 않았다.

힘들고 지친 삶이 계속됐다.


기회로부터 소외된 시간들이었고, 사랑받지 못한 시간들이었다.



아버지를 미워하기 시작한 건 스물도 훨씬 넘어서였다.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정확히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어떻게 해도 나는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었다. 

나를 깔보는 자신을 고쳐보려 했지만 도저히 고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멀쩡한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건 다 아버지 탓이라고.......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는 화를 잘 내고 짜증도 잘 냈다. 충분히 혼날 만한 잘못을 한 거 아니냐고? 글쎄....... 조금은 방을 어지럽혔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혼날 정도는 아니다. 나는 어릴 때 물건정리를 잘하는 편이었고, 잠시 늘어놓아도 알아서 치우는 아이였다. 종일 끄럽게 떠들고 돌아다녔느냐고?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부산스럽지 않고 조용히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였다. 흔히들 말하는 야무진 아이이기도 해서 어딜 가도 사고 따위 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불불쑥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폭죽처럼 트리곤 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남 탓 따위 할 생각도 못한 채,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는 습관이 생겼다.

한 번  소프트웨어는 늘 같은 경로로 작동했다.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내가 더 잘했더라면,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되새김질했다.

윽박지르는 아버지는 나보다 힘이 세서 대항할 수 없었고,  나의 보호자이니 미워해선 안 됐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이 들 때면 늘 깊은 죄책감이 따라왔다.


사랑만큼이나 미워하는 마음도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언제고 생겼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나는 미워해도 괜찮다고 배우지 못했다. 가족을 미워하는 마음에 죄책감을 느꼈다. 미워하는 감정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부정하게 됐다.



막아둔 둑은 언제든 터지기 마련이란 걸 늦게 깨달았다. 아닌 척 눈을 가리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이겨내는 방법이 아니었다. 참는 건 그저 참는 것일 뿐. 

수십 년에 걸쳐 쓸려나간 썰물이 보이지도 않는 먼바다에서 켜켜이 쌓여 거대한 쓰나미로 돌아왔다.


나를 미워하는 마음. 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를 실컷 미워할 수 없는 처지였다.

아버지는 이미 너무 늙어버렸고,

여전히 자기 말만 하고 듣지 않았다.

듣기 싫은 말을 듣지 않아도 될 만큼 더 늙어버렸다.


나는 시간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화가 났다. 나는 잘못이 없다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 미워하고 싶었던 것. 이 모든 것을 지금도 털어낼 수 없다는 사실에. 

한심하게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내게.



알고 있다.

아버지가 받은 유산을 내가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버지도 받고 싶지 않았던 유산이었다는 것을.


......


나는 아버지를 오롯이 사랑하지 못하고

마음껏 미워할 수 없다.




소년도 대통령이 됐을지 모른다.


많은 불행 중 하나가 비껴갔다면.

단 하나의 따뜻한 손이 그를 감싸줬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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