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의 생각 교환일기(17)'찬바람이 불면'

열일곱 번째, 찬 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그 사람

by 채원

시어머니 명희의 찬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사람



찬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돌아오면 언제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나의 삶을 이어가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 존재한다. 삶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위로와 격려로 나를 지탱하게 해 준 따뜻한 사람. '박지현 간호사님'이시다.


남편은 봄에 병원에 입원해서 찬 바람이 부는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언제 퇴원해야 하는지 막연한 생활 속에 있는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시라고 하면서 작은 詩집을 선물해준 그녀. <술을 끊으며>라는 제목에... 冊 속에는 친필 싸인까지 해주었다.


아름다운 사람에게선 향기가 난다고 들었습니다.

진정한 여인의 향기가 나는 김명희 님께 드립니다.


이 글귀를 보면서 나는 아름답게 살기로 다짐했었다. 나도 아름답구나...!!! 나도 진정한 여인의 향기(?)가 나는 여자구나 하고 생각해 보았었다. 따뜻한 글귀의 작은 시집 하나가 나를 변화시켰다. 그것을 계기로 많은 책을 보고 나의 삶의 느낌을 써 내려가고, 여기저기 투고도 해보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삶을 이어가려고 부단히 도 노력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있다. ㅎㅎㅎ


잃어버린 詩


오래전에 죽은

나의 무덤 앞에 서서

비를 맞는다.


곱게 입혀진 잔디를 벗기고

회칠한 흙을 떠내고

빛바랜 관을 연다.


얼룩진 수의를 벗기고

무성했던 고뇌에 머리칼을 헤치며

그리도 가난했던 가슴을 더듬으며

언제였던가 그날

저항 하기를 포기한 나의 죽음 옆에

나란히 함께 묻었던

나의 詩를 찾는다.


더듬고 더듬어도 잡히지 않는

형상 없는 나의 詩

외마디 한올의 詩도 담을 수 없는

가난한 내 시신에 가슴에 비가 내린다.


-김진우-


내가 읊조렸던 詩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채원이는 나에게 여러 가지 주제로 글을 쓰게 하고 있다. 나는 나를 하나의 무기(?)로 생각하면서 강하게 살았다. 친정 모친의 강한 교육 때문에 어려서부터 스스로 인생을 사는 법을 마스터했다고나 할까... 사회생활도 알아서 하고, 결혼도 나 스스로 알아서 하고(?), 누구를 믿고 의지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찬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 남편뿐이다. (결혼하기 전) 낭만적이고 solitary 하고, 유머러스하고 그 당시 멋진 멋있는 남성으로 각인돼있었다.


찬 바람이 불면 데이트를 하고, 영화도 보고, 낙엽 흩날리는 거리를 걷고 언제나 만날 때마다 冊을 선물해주고... 내가 하지 못 하는 것을 그 사람은 잘하는 것이 좋았다. (테니스, 탁구, 당구 e.t.c) 그 아름다운 시절이 아름답게 탑재돼있기에 우리의 삶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찬 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박지현 님!

찬바람 불면 추억을 꺼내보면서 생각해보는 my husband! 나의 삶에 커다란 heritage(?)인 것에 감사한다.


0月21. 木. 2021.



시어머니께서 선물 받으신 책 <술을끊으며>



시어머니 명희의 글 원본



며느리 채원의 찬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사람



정신없는 가을을 보내고 있다. 18개월 된 아이가 처음으로 어린이집을 가게 되었다. 아직 적응 기간이라 머무는 시간이 짧긴 하지만 이렇게 떨어져 본적이 처음이라 마음이 이상하다. 아이보다 내가 더 적응 기간이 길 것만 같다. 올 가을이 완전히 지나면 앞으로 가을 찬 바람이 슝~ 불면 아이의 첫 독립을 하던 요즘을 떠올리며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찬 바람이 슬쩍 불어오면 문득문득 고3 때 담임 선생님이 떠오른다. 남녀공학이었지만 남/녀 반을 나누었고, 인문계 여자만 모인 유일한 반으로 전교 1등도 있고, 반 평균 1등인 반이었다. 첫 번째 여자 담임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한 달 만에 휴직을 하게 되었다. 벙져있던 찰나, 순박한 국어 김효곤 선생님께서 갑작스럽게 담임으로 오셨다. 한참 동안 담임을 맡지 않으시던, 더더욱이 고3 담임 이라니? 제일 당황스러운 건 김효곤 선생님이셨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고2 때부터 국어 선생님이라 좋아했고, 화려한 수업은 아니어도 쌤 특유의 조금 느린 말투와 수업의 흐름을 좋아했다. 사실 첫 번째 담임 선생님은 새로 부임해서 오기도 했지만, 고3에 대해 엄청 베테랑인 척 까랑까랑하게 말하는 게 영 마음이 안 갔었는데, 김효곤 선생님으로 바뀌어 내심 좋았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순수한 여고생들의 믿음을 한 몸에 받는 김효곤 선생님을 질투하시던 옆 반 한문 선생님은 어느 날 수업 중 담임선생님이 뽑아 놓은 입시 자료와 대학교 자료들을 툭툭 치며 "이런 걸 요즘 누가 본다고 이렇게 뽑아놓으셨을까? 너네 보지도 않지?"라고 말했다. 30명 전후가 되는 우리가 거의 동시에 "보는데요?", "형광펜으로 줄 그어져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저희 엄청 보는데요?" 라며 이야기를 하자 한문 선생님은 두 손을 들며 "알았다, 알았어~" 하시며 가셨다. 그때 느꼈다. 와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구나?


분명하게 기억나는 듯, 아름답게 남기려는 기억의 조작이 섞여있겠지만 예체능을 준비하면서 인문계반에 속해 빡빡한 일상을 보내던 나에게 늘 따뜻하게 "선생님은 솔직히 그쪽에 대해 잘 몰라, 네가 알아서 해야 해. 하지만 알아봐 달라는 건 다 알아봐 줄게"라고 말씀해주시던 믿음직스러운 선생님과의 추억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친구 몇몇과 선생님과 종로에서 만나 막걸리도 한잔 마셔보고, "너희들이 대학을 다 잘 가버려서- 전근 간 학교에서 바로 고3 담임을 주었잖니... 힘들다!" 라며 투정도 하시고(강남 8 학군으로 전근을...ㅎㅎㅎ), 꽤 오랫동안 메일로 좋은 글과 선생님의 글들을 나눠 주셨었다. 최근에도 문득 생각나서 문자를 하면 "나는 잘 있다. 낚시 하기 딱 좋다. 눈치 안보며 낚시하고 지낸다."라고 연락 주시는 선생님.


찬 바람이 불면 문득 생각나는 사람과의 기억이 따뜻해서 기분이 좋다. 내일 날이 밝으면 슬며시 연락을 드려봐야겠다. 찬 바람이 불면 선생님께서도 문득 그때의 우리를 떠올려 주실까?



이전 16화시어머니와의 생각 교환일기(16) '가을에 듣는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