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고무나무를 큰 화분에 옮겨 심으면서 말했다. “원래 화분에 있던 흙도 섞어 담아야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 분갈이를 한다고 뿌리에 있는 흙까지 털어버리면 몸살이 날 수도 있어.”
대만 송산공항에 끌고 온 26인치 캐리어와 검은색 배낭가방이 내가 원래 있던 곳에서 가져온 흙이었다. 그 안엔 옷, 화장품, 상비약 같은 것도 있었고 곰 발바닥 무드등, 텅 빈 마리아주프레르 틴케이스 같은 것도 있었다. 어떤 기준으로 짐을 쌌든 그게 내가 가져온 흙이었고 그 밖의 필요한 것들은 이제 모두 이곳에서 새로 구해야 했다.
집을 구한 뒤에 가장 먼저 산 것은 청소기와 걸레였다. 그다음으로는 덮고 잘 침구류를 샀다. 이케아에서 한참을 고민하고 고른 녹색 체크무늬 베개 커버와 침대보를 사서 돌아오니 이제 이걸 세탁할 세제가 필요했다.
까르푸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세제 종류가 다양했다. 비싼 것도 있고 싼 것도 있는데 왜 비싸고 왜 싼지는 알 수 없었다. 섬유 유연제를 세제로 잘못 사지 않도록 적혀 있는 중국어도 잘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고 있는데 엄마 또래의 직원이 다가와서 3천 그람에 99원(한화 약 4천 원)인 파격적으로 저렴한 상품을 추천했다. 같은 용량의 다른 제품보다 절반 가까이 싼 가격이었다. 그 직원은 위스키나 향수 시향을 권하듯 세제 뚜껑을 열어 내 코 아래에 댔다. 포근하고 깨끗한 향이 났다. 하지만 미국 교환학생 때 1달러 샵에서 저품질 샴푸를 사서 썼다가 탈모가 올 뻔한 적 이후로 세제류는 지나치게 싼 걸 사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나는 정중히 돌아섰지만 우리는 금방 다시 마주쳤다. 세제 코너가 그렇게 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그녀는 세제가 아닌 키친타월을 내밀었다. 우리 엄마도 마트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증정품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엄마는 때때로 오늘은 물건이 잘 팔리지 않아 증정을 많이 붙였다고 했고, 또 가끔은 “어떤 년이 본품은 아무 데나 던져놓고 증정만 가져갔다”고 화를 냈다. 그녀가 엄마와 같은 고충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이상할 정도로 저렴한 세제와 키친타월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나를 대만으로 보내면서 무심한 표정으로 “힘들면 그냥 와”라고 말했다. 나는 한때 출구를 봉쇄해놓고 앞으로 밀어붙여야만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건 비장할지는 모르나 잔인한 일이라는 걸 요즘 들어 느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스물아홉에 쓴 첫 소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입구와 출구가 있어야 한다.” 자신이 설치한 쥐덫에 캐시미어처럼 보드라운 회색 털을 가진 어린 쥐가 끼어 죽은 뒤에 주인공이 깨달은 것이었다.
나올 길이 있다는 것,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포기할 자유가 있다는 건 좋은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에게 이상한 낙인을 찍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게 출구를 막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