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일감을 받다

by 티아

내 꿈은 디지털노마드였다. 노트북과 와이파이만 있으면 발리의 해변가에서도, 이집트 스핑크스 옆에서도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디지털노마드 라이프스타일을 꿈꿨다.


회사에 다닐 때는 힘들었다. 시끄러운 알람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듯 일어나면 반쯤 감긴 눈으로 머리를 감았고, 빡빡한 지하철에 올라타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그 비슷한 표정을 하고 한 시간을 버텼다. 엉덩이를 빼면 의자가 뒷사람 의자에 닿을 것처럼 좁은 사무실도 숨 막혔다. 그래서 꿈꾸고 꿈꿨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밀도 있게 몇 시간 일한 뒤 저녁에는 온천에 다녀왔다가 밤에는 영화를 한 편 보고 잠드는 그런 생활을.


회사를 그만둔 결정적인 이유는 워킹홀리데이였지만, 사실은 전통적인 근무 환경에 맞지 않는 게 컸다. 왜 모두가 같은 시간에 일을 해야 하지? 왜 반드시 출근을 해서 같은 곳에서 일해야 하지? 그러니까 지하철이 붐비는 거잖아. 그런 속마음을 딱히 숨기지도 않았던 터라 회사 윗사람들이 나를 ‘집단생활에 안 맞아서 퇴사한 사례’로 분류해두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건너 전해 들었다. 역시 출판사 사람들이라 한 줄 요약을 잘한다 싶었다.


그렇다. 나는 출판사에 다녔다. 출판사 인문팀에서 기획도 하고 편집도 하고 저자 미팅도 하고 보도자료도 썼다. 매년 다섯 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그래서 일 년이 다섯 개의 절기로 나눠지는 것 같았다. 세 번째 책을 만들고 나면 여름이 끝나 있었고 앞으로 두 권만 더 만들면 연말이 올 터였다. 그렇게 열몇 권의 책을 만들고 나니 2년 10개월이 지나 있었고 나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둘 때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나도 몰랐다. 대만에서 일단 일 년을 살아보고 그 뒤에 어떻게 되는지 한번 지켜보자는 마음이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면 다시 출판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대리급 편집자는 업계에서 환영받는 몸이다. 연봉은 적은데 혼자서 책 한 권을 오롯이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취업이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왕이면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디지털노마드로 살 수 있었으면 했다. 유튜브에 검색해보니 디지털노마드 직업을 추천해주는 영상이 제법 있었다. 디지털노마드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프리랜서와 마찬가지로 전문성이었다. 추천 직업으로 마케터, 유튜버, 웹디자이너, 작가, 영상편집자, 온라인 강사 등이 소개되었는데 나는 그중에서 번역가를 염두에 뒀다. 출판사를 다니면서 곁에서 자주 보던 프리랜서들도 번역가였다. 개중엔 전업으로 하는 분도 있었지만 일 년에 한두 달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외국에 나갔다 오는 분도 있었고, 아예 외국에 살면서 일하는 분들도 꽤 많았다. 출판사에서 주로 번역서를 편집했던 터라 번역문 고치는 짬밥은 좀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인생은 참 알 수 없게 흘러간다. 대만에 정착한 지 2개월이 조금 지났을 때 같은 팀에서 일했던 선배에게서 교정교열 외주 제안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번역가보다 더 밀접하게 협업했던 프리랜서들이 바로 교정교열자였다. 종이 출력물을 주고받을 수는 없었지만 피디애프 파일로는 교정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외서 기획을 좋아하는 편집자였지 교정교열을 잘하는 편집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없다고 해서 들어온 일감을 그냥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사람이 벽에 부딪히면 할 수 없던 일도 하게 되고 용기도 막 샘솟고 긍정적이 된다. 시간을 좀 더 써서 꼼꼼하게 보면 괜찮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선배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둔 지 2년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나는 교정교열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디지털노마드가 되었다고 하기에는 와이파이 없이 한글 파일만 있어도 작업을 하긴 하지만, 여하튼 그 비슷한 무언가가 되어보니 업무와 여행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실제로 발리 해변가나 스핑크스 옆에서 교정교열을 하면 잘될지 장담하기 어렵다. 그런 여유는커녕 마감에 쫓기면 회사에 다니던 때보다 하루에 더 오랜 시간을 일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상과 현실은 매우 다르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생활은 포기 못하겠다. 자유를 포기 못하겠다. 한두 달 일감이 없을 때 생기는 꿀맛 같은 생활도 포기 못하겠다. 그럴 때는 영원히 일이 없을까 봐 불안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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