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여행 둘째 날. 간밤에 엄마는 위스키 한 잔 마시고 일찌감치 쓰러져 주무셨고, 나는 내일 어디를 가야 하나 머리를 굴리며 터미널에서 가져온 안내 책자 읽고, 인터넷 검색해보며 시간을 보냈다. 나 어렸을 때 광양에 살았던 우리 식구는 이미 여러 번 남해에 와봤다. 그래서 여행 루트를 짜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 독일마을 갈까?”
“독일마을 너 대학 때 가봤잖아, 기억 안 나?”
“상주은모래비치 갈까?”
“상주해수욕장 너 어렸을 때 가봤잖아, 기억 안 나?”
물론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같은 책, 같은 영화 여러 번 돌려 보는 걸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여행지 서너 번 다시 가는 나는 이미 가본 곳이라고 해서 선택지에서 지워버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미 가봤고,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또 가는 것인데……. 하지만 엄마는 그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머릿속에서 이런 경보가 울리는 듯했다. “삐삐. 이미 와본 곳입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예전 회사 직장동료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자친구랑은 제가 가본 곳, 잘 아는 곳만 가고 싶어요. 여행 와서 막 헤매고, 돌발 상황 발생하는 거 싫거든요.” 거의 칠팔 년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듣는 순간 작은 충격을 받아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내게도 그와 똑같은 면이 있어 공감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관계라면 얼마나 불편할까,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 앞으로 함께 걸어야 할 길이 안 가본 여행지를 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어느 날은 그야말로 지뢰밭을 걷는 듯 험난할 텐데, 두 사람 괜찮은 걸까? 이런 주제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직장동료가 왜 그렇게 방어적으로 구는지도 너무 잘 알았다. 약한 면을 보여줬다가 철퇴 맞은 기억, 어리바리 허둥지둥 댔다가 상대방이 한숨을 쉬고 몸 앞으로 팔짱을 끼고 짜증을 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엄마를 모시고 가는 여행은 이번에 네 번째다. 그중에서도 엄마랑 단둘이 하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 앞에 세 번은 엄마, 나, 동생 이렇게 셋이 다녔다. 내가 가이드를 맡으면 동생은 엄마를 옆에서 살뜰히 챙기고 도란도란 말도 건네는 정서적 역할을 했다. 왼쪽 날개, 오른쪽 날개처럼 동생과 나는 호흡이 잘 맞았다. 그렇게 갔던 여행지가 홋카이도, 북경, 타이베이다. 여행지는 모두 내가 선택했는데, 세 곳 모두 내가 그전에 혼자 여행으로 가본 곳이었다. 손바닥 보듯 잘 알아서 척척 여행 계획을 짤 수 있었다. ‘하코다테에서 삿포로까지 기차로 4시간. 한 번에 가기엔 먼 길이니까 중간에 도야호 근처 온천호텔에서 묵고 삿포로로 돌아갈 때는 온천호텔 셔틀버스를 이용하자. 그러면 돈도 절약되고 한꺼번에 많이 이동했다는 느낌도 들지 않겠지. 하코다테에는 일본 넘버원 조식을 제공하는 유명 호텔이 있으니까 거기서 묵자.’ 북경에서는 이랬다. ‘만리장성은 대중교통으로 가기 복잡하니까 일일투어를 신청하자. 그러면 용경협까지 묶어서 볼 수 있어. 중국은 다른 나라보다 최고급 호텔의 숙박비가 싼 편. 그러니 왕진에 있는 힐튼 호텔에 묵자. 왕진은 쇼핑몰이 많고 그 안에 식당들도 넘쳐나니까 밤이고 낮이고 언제든 맛있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 타이베이에서는 이랬다. ‘지난번에 이용했던 에어비앤비 괜찮았으니까 숙소는 그곳으로 하고, 숙소가 북쪽이니까 신베이터우랑 고궁박물관은 택시로 이동하자. 훠궈는 무조건 ’쩌이궈‘에서 먹어야지. 그렇게 비싸지도 않는데 무한리필 훠궈집보다 훨씬 나아. 엄마는 장신구 구경하는 거 좋아하니까 주말엔 옥시장 가고, 그릇 사는 것도 좋아하니까 잉거도 가자. 천등 날리는 그런 게 제일 싫어하시니까 스펀은 빼.’ 그렇게 내가 가본 곳 중에서 좋은 곳을 선별하고, 나는 안 가봤지만 특별히 엄마의 취향을 고려한 곳을 추가해서 루트를 짜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계획이 세워졌다.
하지만 남해는 나도 잘 모른다. 여기 와서 일주일 동안 버스 한 번, 택시 한 번 타지 않고 거의 숙소 근처만 왔다 갔다 했다. 결국 우리는 금산 보리암에 가기로 결정했다. 엄마가 금산에는 안 가봤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복곡2정류장까지 가는데, 택시 기사님이 그랬다. “오늘 안개가 짙네요. 지금 평지는 괜찮지만 산에 올라가면 잘 보일걸요.” 엄마가 걱정하는 얼굴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가지 말까.” 하지만 보리암까지 안 가면 정말 갈 곳이 없다! 그래서 말렸다. “아냐, 우리 오늘밖에 시간이 안 되잖아. 그냥 가.”
정말 보리암에 도착해 보니 산 아래로 안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바위도 보이고 바다도 보이고 난리가 나는 풍경인데, 이를 어쩌나 싶었다. 여기저기에서 “안개 좀 걷혀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리암에 모인 모두가 한마음인 듯했다. 한 청년은 포토존에 삼각대를 설치하더니 안개가 걷힐 때까지 ‘존버’할 거라고 했다. 일기예보에서 오후로 갈수록 맑아진다고 했으니 곧 안개가 걷힐 것 같기는 했다.
문득 대만에서 허환산에 갔던 기억이 났다. 허환산은 대만 워킹홀리데이를 와서 처음으로 간 여행지였다. 해발 3천 미터 높이에서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새벽 별 투어를 신청하고 엄청나게 기대했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있는 옷 없는 옷 다 꺼내서 단단히 껴입고 투어 버스에 탑승, 구불구불 멀미가 날 정도로 험한 길을 지나 드디어 별 보는 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잔뜩 낀 것이다. 겹겹이 쌓인 안개의 빈틈을 뚫고 별 하나가 보였다. 진짜 딱 하나. 셀 수도 없이 많은 별들이 전부 모습을 감추었는데, 몇 광 년 거리에서부터 쏘아진 딱 하나의 빛이 엄청난 확률을 뚫고 안개를 빗겨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주변 대만 사람들에게서는 어떤 짜증도, 실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 하나 있는 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커(一個)”라고 말하는데 심지어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작은 부처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그 광활한 하늘에 딱 하나 빛나는 별이 다이아몬드처럼 눈부셨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보리암에서 안개는 걷혔다 끼었다 했다. 잠깐 안개가 걷힐 때는 멀리 바다까지 보였다가 다시 안개가 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눈앞의 모든 게 가려졌다. 까마귀 두 마리가 공중에서 물고 뜯고 싸우는데 거의 중국 무림 드라마 한 편이었다. 엄마와 나는 안개 마술쇼를 구경하다가 사이좋게 사진도 찍은 뒤 이제 내려가기로 했다. 엄마는 아까 왔던 길 말고 다른 길로 내려가고 싶다고 했다. 금산 입구 쪽으로 내려가면 되려나, 하고 길을 살피는데 지나가던 어떤 아저씨가 “저 길로 내려가면 지옥”이라고 일행한테 말하는 게 들렸다. 경험상 저런 말은 가슴에 새겨야 한다. 산속에서는 길을 잘못 들면 진짜 고생한다. 잘못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서 돌아갈 수 없다. 죽으나 사나 감각 없는 다리를 질질 끌고 끝까지 내려가야 한다. 안내판을 보니 금산 입구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난코스가 30분 껴 있었다. 엄마와 나는 무리라고 판단하고 다시 보리암으로 올라왔다. 그 사이에 안개가 싹 걷혔다. 과연,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고 싶어서 백일기도를 올린 곳이라 그런지 모두의 염원이 이뤄진 듯했다. 너무 멋진 풍경에 엄마와 나는 할 말을 잃고 “떠나기 싫다”를 반복하며 한 시간 더 앉아 있었다.
금산에는 복곡1주차장과 복곡2주차장을 왔다 갔다 하는 셔틀버스가 있다. 시간을 정해놓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15명이 모이면 그때그때 움직이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운이 좀 따라줘야 하는데, 대부분은 자차를 끌고 오는 데다가 오늘은 평일이라 어쩌면 셔틀버스를 타지 못하고 콜택시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셔틀버스 한 대가 서 있고, 그 안에 사람도 좀 있었다. 금방 15명이 모일 것 같았다. 버스는 어느새 등산복을 입은 어머님들로 가득 찼다. 출발 직전 버스 기사님이 “여기 일행 아니신 분?” 하고 물었다. 알고 보니 엄마랑 나 빼고는 모두 같이 온 단체 관광객이었던 것. 덕분에 금방 복곡1주차장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날씨는 이제 완전히 개었다. 엄마와 나는 버스에 내려서 복곡저수지를 보고 또다시 감탄했다. 저수지 주변으로 산책로까지 잘 놓여 있었다. 군데군데 아직 지지 않은 벚나무가 서 있고 저수지는 짙은 옥빛 위로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저수지를 감싸는 야트막한 산도 귀여웠다. 기쁨으로 충만해진 우리는 계속 더 걸었다. 엄마가 말했다. “어머! 이거 토종 민들레야. 귀한 건데 여기 있네. 잎, 꽃, 뿌리까지 약으로 먹을 수 있어.” 노란색이 아닌 하얀색 민들레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하얀색 민들레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엄마는 이미 민들레 잎을 뜯고 있었다. “너도 좀 뜯어.” 그걸로 우리는 저녁에 반찬을 해 먹었다. 끓는 물에 데쳐서 된장에 찍어 먹었다. 남해에 오면 여기 제철 음식으로 밥을 해먹고 싶다는 위시리스트가 있었는데, 얼렁뚱땅해버렸다. 엄마와 걸은 가보지 않은 길, 즐거웠다.
덧> 이날 바다 위에 진한 크림이 올라간 것 같은 독특한 풍경도 보았다. 마치 신이 입김을 후우 분 것 같았다. 이런 건 일부러 기다렸다가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겠지? 내 물음에 엄마가 말했다. 그렇지. 못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