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무한 모드는 죄가 아니라고요.
오늘도 우리 집 장남(아들 하나이지만 첫째이므로 장남이자 막내이자 외동이다.)은 무음으로 조용히 지능적으로 눈치 살살 봐가며 노트북으로 딴짓하다 걸렸다.
단전에서부터 화가 올라오지만 심호흡하고 경고로 마무리했다. 다년간의 다툼 끝에 사사로운 것까지 싸잡아서 혼냈다가는 제명에 못 살 것 같아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좀 봐준다. 그러면 좀 작작 해야지. 우리 집 장남은 사람 인내심 한계 실험을 기똥차게 해댄다. 이래도? 요래도?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화 안 내? 이렇게 놀리듯 틈만 나면 딴짓한다.
아주 심각하게 남편과 장남의 앞날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장남에게 학원비를 들여가며 공부시키는 것이 의미가 있냐? 가 주제였다. 둘 다 한숨 푹푹 내쉬며 아직 어리니 정신 차릴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판단을 유예한 상태이다. 그런데 이것이! 엄마의 이런 마음도 모르고 활동을 쉬고 있는 휴화산을 흔들어댄다. 대차게. 그럼 다음 순서는 대. 폭. 발.이다.
"야아 아아아아아 아! 너 지금 모 하는 거야? 아까도 그러더니? 지금까지 게임했어?"
눈을 아주 심각하게 크게 뜨며 최대한 자신은 아무 죄가 없고 억울하다는 톤으로 대답한다.
"아냐. 엄마 아냐. 이거 스스로 게임 돌아가게 무한 모드 작동해 놓은 거야. 난 안 했어. 그냥 켜둔 거야."
"똥 싸는 소리 하지 마. 누가 공부하며 게임 켜놓으래? 너 진짜 제정신이야?"
너무 화가 나서 무한모드니 뭐니 게임을 강제 종료했다.
"아아아아악! 엄마 지금 뭐 하는 거야. 같이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지금까지 한 거 엄마 때문에 다 날아갔잖아. 엉엉."
"야. 무한모드라며? 온갖 정신이 여기에 쏠려있는데 이게 공부가 되냐? 너 지금 잘못해 놓고도 이딴 식이야?"
"엄마 나 게임 안 했다니까."
"아... 얘가 막 나가네. 지금 너 내가 게임 껐다고 분개했잖아. 켜놓고 게임 계속 돌리고 공부가 되냐고?"
"흐흐 흐흑... 엄마 나빠. 엄마 그러면 책만 책상에 펴놓고 있으면 공부하는 거야? 아니잖아. 나 숙제하고 있었고 게임만 자동으로 플레이시켜 놓은 거야."
울먹이며 자긴 억울하다 난리다. 책만 펴놓고 공부하는 척하면 공부하는 거냐며 자신은 죄가 없는데 엄마가 과하게 혼낸다고 억울하단다. 얘가 개념을 말아 드셨네.
"가슴에 손 얹고 다시 생각해 봐. 공부할 때 누가 게임을 무한모드로 재생해 놔. 이건 아냐."
"나도 그럼 책만 펴놓고 공부했다고 할 거야. 엉엉"
이미 맛이 갔다. 우기기 모드 돌입 해버렸다. 아비 호출해야지. 난 안 되겠다. 내 말도 안 듣고 이제 게임에 미쳐서 무한모드 모시깽이 거리며 엄마를 무시해 댄다. 한 때 스타크래프트 배틀넷에서 세계인들과 게임을 즐기던 엄마를 게임 무식자처럼 취급하는 네가 참 가소롭지만 그건 라테이야기므로 하지 않았다. 엄마도 게임 좋아했잖아. 어쩌고 저쩌고 꼬리잡기 하면 곤란해진다.
"여보 왜 안 와? 빨리 와."
"응.. 응응. 지금 가려고 했어."
집 앞에서 한가롭게 동료들과 10시 넘어서까지 양갈비에 회식을 어제에 이어서 연일로 즐기시는 남편에게 콜 했다. 거나하게 취해서 혀 꼬부라진 소리 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목소리가 이상하다. 뭐지? 잠시 궁금했지만 살아있는 것은 확인했으니 다시 전화 안 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띠 띠띠 띠 띠띠 띠로록. 문이 열렸습니다.'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니다. 남편의 까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집에 들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창백해!"
"나 이상하게 배가 아프네. 으윽"
양갈비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9시쯤부터 배가 살살 아파왔다고 한다. 술을 작작 먹어야지. 어제도 먹고 오늘도 먹고 자기가 청춘이냐며 술 때문에 그런 거 아니냐고 했더니 한사코 그건 아니란다. 소화가 안된다고 해서 집안 다 샅샅이 뒤져서 소화제 종류별로 먹이고 등 두들겨 주고 손바닥 지압해주고 나니까 아이와 했던 실랑이는 잊혔다. 계속 화장실 들락 거리더니 신생아처럼 분수토를 했다. 나와 장남이 너무 놀라서 괜찮냐고 화장실 문 앞에서 초조하게 불렀다. 여러 차례 저녁 먹은 모든 걸 게워낸 후 남편은 그제야 속이 편하다며 쿨쿨 잠이 들었다.
술주정뱅이 남편 뒷수발에 말 안 듣는 아들시끼까지 두 명이 나를 괴롭힌다. 그림책 '돼지책'을 보면 이러다가 엄마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면서 집에 남은 돼지남편과 돼지새끼들이 알아서 밥 해 먹고살면서 엉망징창 되던데. 그러고 싶나? 부글부글 하지만 남편이 아프다니 원망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속 좀 편해? 병원 가서 엑스레이라도 찍자."
"병원 안 가도 돼. 어제는 윗배에서 뭐가 막힌 것처럼 안 팠는데 이제 아랫배만 조금 쑤셔."
술병 나서 아픈 남편 전복죽해서 먹이고 유산균 2배로 먹이고 장 편안해지는 약 먹였더니 잠이 쏟아진다며 쿨쿨 잔다. 시골 출신인 남편은 집이 학교와 멀어서 고등학교 때까지 매일 자전거로 1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통학했다고 한다. 체력하나는 최고였는데 늙었는지 자꾸 비실 댄다. 항상 아픈 건 내 몫이었는데 집안의 기둥이 아프다니까 걱정이 한아름이다. 왜 인간은 꼭 위기의 순간에 깨달을까?
"엄마 아빠 병원 안 가도 돼?"
아이가 걱정이 되었는지 묻는다. 평소에는 마냥 어리광 부리면서 이런 순간에는 가족 걱정도 하고 심각해지는 게 진짜 우리 집 장남 같기도 하다.
"너 엄마 알지? 엄마가 너나 아빠가 아프게 그냥 두지 않지. 엄마가 많이 아파봐서 대처가 빠삭하잖아. 걱정 마. 아빠 다 나으셨대."
아빠가 온몸으로 몸빵 해서 게임 무한모드 한 것은 그냥 없었던 것처럼 날아갔다. 우리 집 장남 운빨 장난 아니네. 로또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