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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스런 후후작가 Jun 06. 2024

지문적성 검사

볼빨간 삿춘기

"어머니 잘 지내셨죠? 내일 3:30 이후에 시간 되시면 교문 앞에서 지문적성검사받아보세요. "

"선생님 연락감사합니다. 하교 후에 체험해 보겠습니다. ^^"


이미 년초에 그만둔 학습지 선생님의 연락이다. 현재 하고 있지도 않은데 일부러 신경 써서 연락 주셔서 더 감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만둔 다른 친구들은 모르고 있었고 우리 집만 연락을 주신 거였다. 지문적성검사를 해본 적이 없기도하고 궁금하기도해서 하교 후에 가보았다. 열 손가락을 쫙 벌리고 엄지부터 새끼까지 양손 모두 지문을 찍어서 나온 데이터를 숫자화 해서 현황판에 적으셨다. 언뜻 현황판을 살펴보니 바로 직전에 아이친구들의 검사결과가 보였다.


왜지? 골고루 3,4,7,8과 같은 숫자들이 가득한 친구들의 결과지와는 다르게 이분은 1,1,1,1,2,1,1,... 거의 1에 수렴하는 결과값을 받았다. 검사하시는 분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학생 스트레스 많이 안 받죠?"

"네? 안 받기는요. 숙제할 때 짜증 엄청 부려요."

"에이~ 숙제할 때 하기 싫으니까 그렇겠죠. 스트레스 없이 안정적인 상태인걸요."


모지? 모야. 나도 받아볼걸. 죄다 99999999 이렇게 나왔을 텐데. 세상해 지문 적성 검사 결과도 이렇게 청순하게 나올 수가 있나? 두뇌 말고 지문도 청순하다니. 너 너무나 매력 있구나.


청순한 지문 소유자씨는 주말 내내 붙잡고 있었던 영어숙제를 결국 다하지 못하고 과외에 갔다. 화가 난 선생님께서 해오라는 숙제를 제대로 안 하고 이상한 단원 문제풀이를 해오고 단어도 안 외워왔다고 혼내야겠다고 전화하셨다.

아.... 속에서 천 불나...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바깥에서는 더 새겠지.

결국 원래 끝나는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딜레이 돼서 한참을 밖에서 기다렸다. 수업 후 상기된 얼굴로 나오더니 혼자 걸어가겠단다. 많이 혼났나 보다. 길도 잘 모를 텐데...

혼자 운전해서 집에 와서 기분 풀어 주려고 치킨을 시켜서 기다렸다.




"엄마 오늘 저녁모야?"

"우리 아들 좋아하는 굽네 치킨이지."

"고... 고추 바사삭?"

"응 ㅋㅋㅋ."

"으하하하하 맛있겠다."



단순한 놈.


혼난 것 다 까먹었다. 인크레더블 2를 보며 맛있게 치킨을 먹고 나서 웬일로 군말 없이 영어숙제에 열을 올리길래 슬쩍 물어봤다.


"아까 많이 혼났어?"

"응, 나 선생님 꼭 이기고 싶어. 보란 듯이 잘하는 것 보여줄 거야." 이글이글한 눈빛. 꺄악 너무 마음에 든다.

"그래 숙제 중구난방으로 해서 혼났구나. 구멍 죄다 메꾸고 너 원하는 곳으로 가자."

"응 아까 욕먹을 때 난 어차피 3개월만 하고 떠날 거니까. 괜찮다는 마음으로 버텼어."

"오~ 바람직하다. 응원할게. 너 원하는 곳으로 꼭 옮겨."

"응 난 증오가 있어야 원동력이 되거든."

"응 그래;;;"


너도 모범적이고 순하고 엄마가 하라는 데로 하고 까불지 않으면 혼나지도 않겠지. 우린 전혀 아니니까 눈물 한번 닦고.

수없이 깨지고 생채기 나는 나날들이지만 아이의 내면에는 새살이 돋고 그러며 단단해지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을터 하루하루 크느라 얼마나 힘들까? 나 자신도 내 마음대로 안되는데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매일 느낀다.

아이의 방청소를 하며 책상 밑에 떨어진 메모장이다. 아이의 힘듦이 느껴 저서 청소하다 말고 눈물이 났다.

열 달 동안 엄마 뱃속에서 엄마와 한 몸인 줄 알고 살았던 아이가 어린 시절 젖물리며 생긋생긋 예뻐만 해 주던 아이를 지금은 공부 못한다고 구박하고 혼내고 소리 지르고 낙오자로 만들었다.


수학 영어가 뭐라고... 외롭고 힘들었을 아이를 생각하며 조금은 따뜻하게 안아주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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