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 반에 사귀는 애들 생겼데!
솔직히 나 어릴 적에는 이렇게까지 공부하지 않았었는데 요즘 아이들 정말 불쌍하다. 그냥 좋아하는 여가생활하며 보냈다가는 진도가 안 맞아 들어갈 학원조차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꾸역꾸역 학원을 다닌다. 이런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잘해주다가 뒤통수 맞기를 여러 번. 측은지심은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잘 숨겨두고 오늘의 할 일을 모두 할 수 있도록 멱살 잡고 하드 캐리해야 전부 다 할까 말까 하는 것이 현실이다.
끝날시간이 지났는데 수학 학원에서 아이가 돌아오지를 않는다. 오늘 남아서 오답 고치고 온다는 연락은 받았지만 너무 늦지 않게 오라 하였건만 저녁시간이 훌쩍 지나도 오지를 않는다. 반찬을 다 해두고 접시로 옮겨 담았다가 아이가 좀처럼 오질 않아 호박적과 버섯볶음이 죄다 식어버렸다. 먹기 직전에 따뜻하게 데워주려고 다시 프라이팬으로 옮겨담으며 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는다. 또 했다. 안 받는다. 이것이!
10분 후쯤 전화가 걸려온다. 오답을 다 고쳐야 진도를 나가는데 오답이 많아서 오늘은 늦게까지 남아야 한다고 선생님께서 안 보내주신단다. 열심히 하라고 토닥이고 음식에 먼지 들어갈까 싶어 프라이팬 뚜껑을 닫아버렸다.
9시가 다되어 집에 돌아온 아이는 자기가 오늘 너무 열심히 해서 배가 무진장 고프다고 저녁이 모냐고 묻는다. 숙성소고기 등심이라는 말을 듣더니 너무 신나 하며 집에 빨리 오겠단다. 거실 창문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면 학원 창문이 보인다. 사거리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집이라 길어야 7~8분 내외면 집에 도착한다. 오랜 시간 학원에서 공부하며 배고플 아이 생각에 재빨리 상을 차렸다. 오기 바로 직전에 등심을 구워서 맛있게 쌈을 싸 먹였다.
"엄마, 나 오이 먹어볼래."
왠열. 오이는 사람이 먹는 음식이 아닌 것처럼 소 닭 보듯 외면하던 아이인데 무척이나 허기졌나 보다. 오이를 쌈장에 찍어서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맛있지? 방금 윗집 할머니께서 귀한 상추랑 오이랑 조금 전에 주셨어. 방금 밭에서 따오신 거래."
"너무 맛있어. 또 달라고 하자."
"주면 감사한 거지 어떻게 또 달라고 하니. 오가며 만나면 오이 너무 맛있었다고 인사해. 그럼 또 생각나시면 주실 수도 있지."
"응 오이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또 오이 언제 커요? 이럴까 봐. 크하하"
배가 어느 정도 차더니 먹는 속도가 현저히 줄며 몸이 늘어진다. 미주알고주알 그날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서 귀가 아프다는 동네 여자아이 엄마의 말을 들을 때마다 부러웠었는데 웬일로 아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엄마, 완전 특급 사건이 있었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안 들으면 너는 너무나 손해라는 듯 말하고 싶어 미칠라고 한다. 뭔가 있긴 있군.
"뭐? 누가 사고 쳤어?"
"사고? 사고는 아니고 우리 반 민수랑 예서랑 사귄데. 와 장난 아니지? 같은 반인데 막 사귀고 그런다."
"오! 장난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민성이가 알려줬어. 이미 애들 다 알아. 이제 개들 못 헤어져."
자기가 사귀는 것도 아닌데 이건 뭐 세기의 스캔들처럼 들떠서 계속 이야기한다.
"웬일이야. 이제 사랑이 꽃피는 교실이 되기 시작하는구나. 본인들이 다 떠들고 다닌 거야? 소문나서 괴로운 거 아닌가?"
"아냐. 내가 말했는데?"
띠이이이용~ 뭔 소리야. 이 따발총 같으니. 혹시나 해서 다시 물었다.
"모야? 네가 말했다고? 민성이한테 들었다며."
"응, 민성이가 나한테 말해주고 내가 준우, 시헌이, 세진이한테 말했어. 반애들 다 알아. 으흐흐흐흐."
"야 친구 비밀을 그렇게 누설하면 으뜨케에에!! "
"아 괜찮아. 애들 다 알아. 그리고 둘이 주말에 흐흐흐 영화 보러 간다고 하던데?"
"웬일이니 웬일이니 영화? 단둘이. 재밌다. 아 근데 넌? 너도 누구 좋아하는 사람 없어? 너도 여자 친구 생기면 바로 말해야 돼."
"나? 캬캬캬 난 아시다시피 모태솔로지."
"누구 없어? 사귀고 싶은 사람?"
"에이 난 안 사귀어. 난 중학교, 아니다 고등학생쯤은 돼야 사귈 거야. 아직 준비도 안되어서 누굴 만나."
이거 봐라. 준비? 너무 재밌어서 좀 놀리고 싶었다.
"무슨 준비? 이성한테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야. 누군가 좋아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지. 사귀어봐. 엄마는 찬성이야. 그런데 너네는 사귀는 게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막 뽀뽀하고 그래? 으흐흐."
"와... 엄마 와... 엄마랑 말 안 해. 무슨 뽀뽀. 말도 안 돼."
아이가 이성교제에 대해 어디까지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좋아하면 소중하게 생각하고 손도 잡고 싶고 포옹도 하고 싶고 만지고 그렇잖아."
"와 엄마 만지긴 어딜 만져. 와... 엄마 와... 엄마"
얼굴 벌게져서 엄마와 이런 이야기하는 게 매우 불편하다는 듯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금기사항인 듯 아닌 듯 재빨리 피하는 게 수상하다.
이분이 뭘 봤긴 봤어. 스킨십이야기하니 왜 니 볼이 벌게지니? 조만간 핸드폰 기록 좀 봐야겠다. 이렇게 반에서 첫 번째 커플은 공개연애를 시작했고 아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챙겨주며 사귀는 중이다. 그 모습을 보며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누군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상상만으로도 귀가 빨개지는 아이인데 고백이라도 받으면 얼음이 될지도 모른다. 친구 엄마가 후군 챙겨준다고 빼빼로 데이에 피아노학원 앞에 놓여있는 아이 가방에 빼빼로를 넣어둔 적이 있다.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나온 후군이 빼빼로가 생겼다며 의아해하길래 장난기가 발동해서 누가 너 좋아하는 것 같다며 몰래 넣어둔 것 같다고 장난친 기억이 난다. 그때도 내심 싫지 않은 눈치였다. 머지않을 미래에 누군가 좋아져서 사귄다면 후군이 얼마나 설레어할지 상상하니 너무 귀엽다. 착한 여자 친구 만나야 할 텐데 여자친구가 누가 되었던지 소중하게 아끼는 마음으로 서로 교재 하기를 바라본다. 한 돈 두 돈 금 모았다가 누가 될지 모르지만 미래의 며느리에게 물려줘야지. 얘야, 반품 불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