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랑스런 후후작가 Jun 26. 2024

비 온 후 황톳길, 고생길  

빨래 방망이로 두들겨 패고 싶구나

  비 온 후의 황토밭길을 걷는 것은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다. 그렇다. 우리 집 사춘기 아이는 꼭 이럴 때 걷자고 한다. 비 온 후의 물기를 머금어 찐득 거리는 황토가 발에 덕지덕지 묻을게 자명한데도 막무가내다. 저녁 먹고 소화시킬 겸 가볍게 공원 한 바퀴만 걷자고 나온 게 일이 커졌다. 게다가 나의 하얀 슬리퍼는 황토에 닿으면 너무 쉽게 물들께 뻔해서 더더욱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그분은 입장하셔서 나를 부르고 있다. 이럴 때만 총알탄 사나이처럼 가볍게 움직이니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이 맞다. 예상한 데로 고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언젠가부터인가 맨발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소문이 입소문을 타고 지자체의 사업에까지 영향을 줬다. 산길, 흙길은 물론 바닷가의 모래밭길을 걸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맨발 걷기 영상을 공유하고 장점들을 입을 모아 찬양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전국에 맨발황톳길이 조성되었다. 관심은 있지만 거친 산을 맨발로 걷다가는 발에 뭐라도 박힐까 봐 무서워 시작도 못했던 나에게 집 앞 공원의 황톳길 개장이 반가웠다.


파상풍 주사 맞아야 하나?

벌레 밟으면 어쩌지?

무좀 있는 아저씨들 많던데...


  루머의 루머의 루머처럼 온갖 걱정거리가 떠올랐지만 호기심이 이내 눌러버렸다. 개장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며 길이 다져지면서 질퍽거리던 황톳길이 제법 단단하고 걷기에 부드러운 길로 변했다. 이건 평소의 황톳길이고 비 온 후는 사정이 달라진다. 밀가루 반죽을 오랫동안 치대면 제법 형태를 갖춰 성형하기 쉽게 변한다. 오랫동안주무른 밀가루반죽은 손에 잘 묻지도 않고 글루텐이 생겨 점성이 높아지게 되는데 여기에다 물을 끼얹으면 반죽이 찐덕대며 다시 손가락에 덕지덕지 붙는 것처럼 비를 머금은 황톳길은 최악이다. 아 너무 싫어 싫어 싫어. 부모가 사춘기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은 싫은 것을 견디는 기간인가? 속으로 오만 욕을 다 해가며 혼자 보내면 위험할까 싶어 뒤를 따라나선다.





질퍽질퍽

물컹물컹

미끌 미끄덩


  비 온 후 물 만난 황토는 다리 종아리까지 묻었고 옷에 묻을세라 신경을 곤두세워서 걸어야 했다. 운동을 하는 건지 온몸 경직을 체험하러 온 건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 사이 소화가 다 되었다는 것이다. 몸무게는 고도비만이지만 선택적으로 매우 가볍게 뛰는 저 녀석은 초능력자가 분명하다. 저 초능력으로 공부할 때는 두뇌의 스위치를 on에서 off로 꺼버리고 빙구처럼 구니 상위레벨 초능력을 갖춘 게 분명하다.


  오늘따라 더 길게 느껴지는 황톳길을 걷는 동안 그 사이 날이 어두워지고 이제는 눈에 뵈는 게 없어 무섭다. 핸드폰의 라이트에 의존해서 넘어질세라 조심조심 걷는다. 길 가장자리 움푹 들어간 곳에는 물웅덩이가 고여서 피하며 걷느라 평소에 2~3배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애랑 전쟁통에 신발도 없이 흙길을 걷는 상상이 들며 지금 이 길이 황톳길이 아니라 황천길이 아닌가 싶다. 빨리 저 인간 데리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해져 온다. 황톳길 끝에 다다르면 세족 할 수 있는 수돗가가 있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고 눈에 보이는 데로 큰 흙덩이를 씻어내고 신발에 묻어있는 일단 보이는 황토들은 1차 세척을 했다.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역시 조심한다고 했지만 바지며 신발이며 발톱사이며 온갖 황토물이 들어있다. 뒤처리의 모든 게 다 내일이다. '야야야 방에 들어가지 마 화장실로 직행해야지, 어어어 모 하는 거야 옷 벗어서 빨래통에 넣지 말고 세면대에 놔. 손빨래해야 해. 샤워할 때 풋샴푸로 발 구석구석 닦아.' 옛날 어머니들께서 빨래터에 방망이로 빨래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가늠해 보건대 백퍼 욕하며 두들겨 팼을 것이다. 저님은 콧노래 하며 샤워하고 나오더니 개운하고 좋단다. 애미가 매일 영혼을 갈아가며 키우는 걸 알까 모르겠다.  

이전 03화 볼 빨간 사춘기 맞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