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살 식탁
노트북 마우스가 식탁에 들러붙어서 움직일 때 힘을 더 줘야 움직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무빙 되었는데 습도가 올라가며 식탁 위에 쩍쩍 달라붙는다. 장마철이 왔음을 마우스 무빙으로 직감한다.
10년 전 내 집 마련 선물로 부모님께서 선물해 주신 우리 집 원목 식탁은 그 후로 이사할 때마다 항상 함께였고 이제는 한쪽 다리의 나사가 헐거워져서 식탁을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안쪽으로 접혀 들어갈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 내 일상은 아침에 식탁 다리를 온전하게 밖으로 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4개의 다리 중에 하나만 말썽이라 아직은 쓸만하니 아쉬운 데로 손품을 팔기로 한다.
신혼 초에 식탁에 유리를 깐 적도 있다. 안쪽에 예쁜 식탁보와 가운데 체크무늬 러그도 깔아서 신혼분위기를 내봤다. 보기에만 예쁘고 손과 팔에 닿을 때 느껴지는 유리의 차가운 감촉이 싫었다. 밥 먹을 때뿐만 아니라 책 읽거나 일을 할 때도 첫 느낌이 차가워 나의 체온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뜨거운 김치찌개를 받침대 없이 올려두자 순식간에 유리가 굉음을 내며 쩌~억 갈라졌다. 싫지만 처치하기 곤란했던 차가운 녀석을 이제 없애 버릴 명분이 생긴 순간이었다. 유리를 조각 내기 위해 박스에 넣어 부셔서 쓰레기봉투에 버려 버렸다. 식탁보까지 없애고 보드랍고 따뜻한 식탁의 맨살과 처음 만났다. 만났을 때 차갑지 않고 포근한 나무 그대로의 느낌. 그 후로는 어떤 책상과 식탁에도 유리를 깔지 않는다. 식탁 맨살 맛을 봤기 때문이다.
맨살 식탁의 단점도 있다. 물과 열에 매우 약한 녀석이다. 특히나 원목이라서 물에 매우 취약하다. 시간이 지나며 코팅이 벗겨졌는지 여름철 차가운 물이 담긴 컵을 식탁에 올려두면 컵 주변에 물방울이 맺혀 흘러 식탁자리에 동그라미가 생긴다. 닦아도 그 자리가 물에 불어서 허옇게 변해 버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식탁 스스로 자가치료를 하는지 원도 사라져 있다. 알코올로 닦아내며 사용해서 나무의 코팅이 벗겨진 게 아닌가 싶지만 그래도 맨살을 포기할 수 없다.
피자를 배달시켜 식탁 한가운데 두고 맛있게 먹은 후 포장용기를 버리려고 들어 올린다. 식탁에 포장지 종이 밑면이 쩌~억 달라붙어 포장지 문구들이 식탁에 문신처럼 박혀있다. 포장용기를 들어 올릴 때 문신이 있나 없나를 살피는 게 일이 되었다. 비닐 위에 올려두면 되는데 막상 먹을 때는 까맣게 잊고 포장지 그대로 식탁에 올린다. 가끔은 식탁이 너네만 먹냐고 샘 부리는 일종의 반항같이 느껴진다. 코로나 시절 바이러스 공포에 쟁였던 알코올 함유 70프로 손소독용 겔을 휴지에 묻혀 지우면 문신을 완벽 제거 할 수 있다. 닦고 닦고 또 닦고 맨손 얼굴에 나의 손때가 가득하다.
아들이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부터 함께한 식탁에 여기저기 추억이 묻어있다. 키가 1미터도 안 되는 꼬맹이시절. 아이 이마에는 온통 멍투성이였다. 잠시 한 눈 팔면 식탁밑에 들어가려다가 머리 박고 울고 있었다. 이때부터 꼴통인자를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땐 그것마저 귀여웠다. 아기 있는 집들이 그렇듯 인테리어를 포기하고 식탁 네 귀퉁이와 모서리에 파스텔톤 쿠션밴드로 붙여놨다. 신기하게 쿠션밴드를 붙인 이후로는 식탁에 머리를 덜 박았다. 부딪히면 충격을 흡수하는 용도가 아니라 잘 보여서 피할 수 있는 용도로 더 많이 쓰인 것 같다. 아이가 급성장기가 오며 식탁보다 더 키가 커져서야 밴드를 땔 수 있었다.
무엇이든 오래 쓰고 잘 못 버린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저장 강박 비슷한 것 같다. 잘 버려야 깔끔하고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텐데 잘 쟁이고 정리하며 공간을 만드는 쪽을 택했다. 정말 큰맘 먹고 정리해서 반년에 한 번씩 커다란 100리터짜리 봉투 3개에 더 이상 쓰지 않지만 아직은 쓸만한 것들을 모아 굿윌스토어에 기부한다. 기부한 것들 또한 누군가에게 가는 것이니 이것도 엄밀히 보면 버리는 게 아니라 이동하는 것이다. 강박 맞나 보다. 이렇게 라도 물건의 개수를 빼니 집이 헐거워지는 듯하다.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선택해서 살면 된다. 오늘도 청소하다 밀린 식탁 다리 하나가 안쪽으로 밀려들어 갔다. 다시 펴서 수평을 맞춘다. 아마 다리 두 개는 고장 나 접혀야 바꾸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