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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Oct 10. 2019

사람은 그릇, 존재와 당위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은유중 하나가 '그릇'이다. 우리는 "내 안으로 들어와"라는 말이나 "그 친구 회사 나갔어?"라는 말로 상황을 '안과 밖'으로 나누고 '들어오고 나가고'를 통해 상황을 이해하고 소통한다. 이는 그릇이 갖고 있는 개념구조와 동일하다. 이를 '그릇 은유'라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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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그릇에 은유하면 내면과 외면이 있다. 내면은 그릇안에 담긴 내용물이고, 외면은 보여지는 모습이다. 이를 보통 내용과 형식이라고 말한다. 이 개념구조는 여러가지 상황을 낳는다. 가령 예쁜 그릇 안에 구정물이 있다거나 못생긴 그릇 안에 맑은 차가 있다거나... 만약 전자라면 외모는 예쁜데 마음이 안좋고, 후자라면 외모는 그저그렇지만 마음은 훌륭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물론 외모와 마음이 모두 훌륭할 수도 있고, 모두 별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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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런 그릇 은유를 기준으로 사실(존재)와 가치(당위)를 판단한다. 보통은 겉모습은 사실이고 내면은 가치라고 생각해 위에 예시한 느낌으로 판단하는데 이는 큰 오해이자 오류다. 사실과 가치는 외면과 내면으로 구분되어 사실로 가치를 규정하거나 가치로 사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외면으로 내면을 규정하거나 내면으로 외면을 판단하는 것이니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모나 마음으로 그 사람을 규정하고, 상대방을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외모가 우선되는 경우는 소개팅에서 자주 있고, 마음이 우선되는 경우는 "그 사람은 마음이 참 좋은 사람이라 그런 일을 했을리가 없어"라고 생각해 사기를 당하는 경우다. 이번 화성연쇄살인범 이춘재가 그런 방식으로 수사망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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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가치는 별개가 아니라 연계된 문제다. 사람됨에 있어 '외면과 내면'이 따로 있지 않듯이 판단됨에 있어 '사실과 가치'도 함께 다닌다. 외면에서 '사실+가치', 내면에서 '가치+사실'로 외면과 내면 각각 따로따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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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밖에서 사실은 외모(형식)이다. 여기서는 사실이 가치를 규정한다. 이때 가치는 여러가지 사실들의 위계질서이거나 우선순위가 있다. "나는 핑클 중에 이진이 좋더라. 그 다음에 유리, 나머지는 그냥 그래"라고 말하면 사실들 중 선호도의 위계질서가 생기고 이진의 팬클럽에 우선순위가 부여된다. 아름다움을 르네상스 이후 미학적 개념에 한정한다면 이를 美적 판단이라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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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으로 가면 사실과 가치는 반대가 된다. 그릇 안에서 가치는 마음(내용)인데 쉽게 말해 좋음과 나쁨의 느낌이다. 스피노자는 이를 기쁨과 슬픔이라 나누고, 생물학에선 이를 접근과 회피로 나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함과 미숙함으로, 동양철학은 善과 不善으로 구분한다. 그릇 안에서는 가치가 사실을 판단한다. 마음은 좋은 가치만을 사실로 여기고 나쁜 가치는 부정한다. 나쁜 마음이 느껴지면 즉각 회피하기에 나쁜 사실은 멀어진다. 마음에서 아예 삭제되어 사실 자체가 부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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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신경을 기준으로 그릇 안과 밖으로 나누어져 있다. 안과 밖에서 사실+가치로 판단된 정보들은 이성으로 모여 판단의 재료가 된다. 이때는 가치만이 활용된다. 외면에서 온 우선순위와 내면에서 온 좋음이 만나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당연히 옳은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이때 이 옳음이 성공하게 되면 그 판단은 계속 유지되고 실패하면 가치는 다시 수정되어야 한다. 이 '옳음+성공' 방정식이 과학(참과 거짓의 판단)과 기술(성공과 실패의 판단)을 융합 '과학기술'을 낳았고, 이 과학기술이 중세의 신을 대체했다. 절대적 기준의 신이 경험적 기준의 과학으로 바뀐 것이다. 우린 그런 사회를 살아간다. 그래서 늘 불안하다.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와인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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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은유의 '안과 밖'은 우리가 생긴것에 의한 '앞과 뒤', 자연의 중력에 의한 '위와 아래', 시각적 판단인 '가깝고 멈'과 함께 가장 중요한 우리의 인식 개념 구조이다. 이 구조들을 미리 알고 있으면 철학적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는데 상당히 유용한 도구가 된다. "아 이분은 이런 개념구조로 은유하고 계시구나"라고 생각하며 텍스트를 독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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