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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흥라떼 Jan 27. 2023

쑥쑥 자라라고 하는 거예요.

아이의 함박웃음이 아침, 저녁으로 이어진 날

올해로 6살인 우리 둘째는 자기 주도성이 높은 아이다. 특별히 어떤 검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아이를 지켜보면 무엇이든 혼자서, 스스로 하는 걸 즐거워하며 본인이 이루어낸 작은 성취에도 박수를 치며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보통 그날그날  입고 싶은 옷, 바지, 양말, 소품(장갑, 스카프 등)까지 스스로 고르게 하고 입는 것도 혼자서 하도록 유도한다. 부모인 우리는 곁에서 지켜보다가 도움을 요청하면 자연스레 손길을 내민다. 이틀 전 아침 둘째는 유치원에 입고 갈 옷으로 원피스를 골랐다. 아이가 머리를 넣고 양팔을 소매 끝으로 숭숭 내민 뒤 나는 자연스럽게 아이 뒤에서 지퍼를 올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몸을 내 앞으로 돌리고는 이런 말을 한다.


엄마, 지퍼 내가 올려볼래요.


그 순간 번뜩 든 생각은 '굳이????'였다. 아니 엄마인 내가 도움이 딱 필요해 보이는 순간에 손을 내밀었는데 왜 굳이 스스로 하려는 거지? 내색하진 않았지만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연스럽게 다시 내 앞에서 등을 돌린 아이의 한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손이 등 아래쪽에 위치한 지퍼에 닿게 도와주었다. 아이는 3cm 남짓 겨우 겨우 지퍼를 올렸다. 뒤돌아선 아이는


우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퍼 내가 올렸다!


월드컵에서 한 골 넣고 신이 난 선수처럼 우리 딸의 얼굴에 웃음이 짙다. 태어나서 처음 지퍼를 올린 날이라니. 참 별개 다 기념적이다 싶으면서도 이런 작은 성취를 웃으며 말로 표현해 내는 아이가 신기하기만 하다. 이 말이 머릿속에 자꾸 맴돈다. '태어나서 처음' 뒤에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 따라올 수 있구나. 만 5세가 된 아이의 눈 속에 비친 세상은 아직도 처음 경험한 것들, 그리고 처음 이룬 것들이 많구나. 여기서 더 나아가면 여전히 처음 이룰 것들도 무궁무진하겠구나! 싶은 깨달음.


때때로 생각해 본다. 아이의 인상 깊은 말들 하나하나를 긴 실로 엮어 한쪽 끝은 내 손에 모아 꼭 쥐고 있고 싶다. 아이의 그 순간의 감정, 우리가 주고받은 눈빛들을 바람처럼 날려버리지 않고 생생하게 내 두 손에 모아두고 싶다. 하지만 아이 셋 엄마의 현생은 너무나도 정신없이 흘러간다. 아이의 감동적인 말, 놀라운 말, 엉뚱한 말을 그 순간에는 잘 들었지만 그저 귀로 잘 들었을 뿐이다. 더 곱씹을 겨를도 없이 까마귀고기를 먹은 사람 마냥 금세 잊어버린다. 그래서 더 아이의 말을 이렇게 글로 남겨두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저녁밥을 다 먹은 둘째는 또 자기의 바람을 흘러가듯 내비쳤다. 오늘 설거지가 하고 싶단다. 집집마다 이런 아이들이 많을 것 같다. 우리 집 아이 둘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역시 평일의 저녁은 쉴 틈 없이 흘러가기에 쉽사리 아이에게 싱크대를 내어줄 수가 없다. 아이의 저지레에 가까운 설거지를 어찌 웃으며 지켜볼 수 있을까? 그러기엔 내 육신이 너무 피곤하다. 하지만 아침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퍼를 올렸다며 기뻐하던 아이의 미소가 떠올라 갑자기 수막새의 미소 못지않게 나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럼 한 번 해보라고 호기롭게 기회를 주었다.(옆에서 남편은 비록 한 숨을 쉬었지만) 이전에 나온 그릇들은 내가 싹 다 설거지를 해버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식판, 수저, 컵, 접시 딱 한 세트만 아이에게 맡겼다.


시작하자마자 아주 난리 대폭탄이다. 수전을 숟가락으로 막으며 낄낄 웃는다. 누가 보면 워터아티스트인 줄(이건 내가 급하게 지어낸 직업명이다.) 그동안 나는 수도세를 아끼기 위해 물도 절반 정도만 틀어두고 짠내 나는 설거지를 해왔는데 딸은 마치 물풍족 국가에 사는 사람처럼 펑펑 틀면서 씻은 그릇을 또 씻고 씻은 그릇을 또 씻고 열 번도 더 씻는다. 게다가 갑자기 컵 한가득 물을 받더니 싱크대 배수구에 마구마구 들이붓는다. 옆에서 관심을 끈 척하며 싱크대 정리를 하다가 한 번씩 곁눈질로 지켜보는데 그 행동을 두어 번 더 하길래 결국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 여기에 물은 왜 붓냐고. 그랬더니 아이의 대답은


쑥쑥 자라라고 하는 거예요.

기절초풍할 일이다. 얘 뭐지 싶은. 그런데 듣자마자 웃음이 팡! 하고 터진다. 몇 시간이 지나고 며칠이 지나도 이 말이 계속 생각난다. 거들떠보기도 싫은 음식쓰레기에게 물을 주면서 쑥쑥 자라라고 하다니. 어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정말 기가 막히지만 그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은 모성애가 뿜뿜 솟아나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그날의 설거지(라고 쓰고 워터퍼포먼스라고 읽는다.)가 매우 흡족했는지 언니에게 자랑도 한다. "언니야 나 물폭탄 했어. 아까 물폭탄 한 거 봤어?" 아, 이게 자랑할 일이구나.


23개월 된 막둥이는 설거지를 하는 둘째 누나 옆에 찰싹 붙어 까치발을 들고 잠시 지켜보더니 "00이 (누나) 잘한다!!!!!!"라고 칭찬을 한다. 그래 맞다. 우리 딸 오늘 지퍼도 혼자 올리고 설거지도 혼자 해냈구나. 엄마 눈에는 누나가 그저 엉뚱해 보이기만 했는데 막둥이 눈에는 설거지를 잘하는 누나로 보이는구나. 엄마보다 더 나은 막둥이의 심플한 칭찬을 들으며 이 상황은 종료되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어떤 엉뚱하고 재밌는 삶을 살게 될까?


물폭탄이 보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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