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서 전학생으로 살아남기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이사를 많이 다녔다. 그때마다 학교를 전학가야 했다. 내가 기억하는 처음의 전학은 유치원이다. 당시에는 초등학교 입학 전 1년 정도만 유치원에 다니던 시기였다. 부산 초량에 사시던 외할머니댁 근처 삼일 유치원에 입학했다가 이사를 부산 개금동으로 가면서 에덴유치원으로 전학을 가서 졸업을 했다. 어린 마음에 새로 전학 간 유치원에서 처음 연주해야 했던 멜로디언이 어려워서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
그곳 부산에서 개금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당시에는 학생수가 많아서 오전, 오후 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때였다.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 건너야 했던 철길 위 구름다리가 기억이 난다. 매달 네 과목 시험을 봐서 한 과목이라도 90점 이하이면 상장을 받지 못했었다. 어린 시절 그 상장받는 재미에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3학년 1학기 여름방학 전 시험에서 한 과목이 90점 안되어 상장을 못 받았다. 마음이 무척 속상했었다. 그 속상함을 뒤로하고 난 서울로 전학을 왔다.
서울 신림동 미성초등학교는 3학년 2학기만 다녔다. 왜 그렇게 그곳에서 짧게 살아야만 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부모님이 속상해하실 수도 있으셔서 그 이유를 정확히 여쭤보지는 않았다. 어쨌든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 온 나는 일말의 자존심이 있었다. 부산에서 어느 정도 공부를 잘했다고 생각했고 서울에서도 그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사실 다른 내세울 것이 없어서 공부를 한건지도 모른다.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며 약간의 놀림도 받으며 성적은 어느 정도 유지했던 기억이 난다. 다만 이 학교에서는 한자시험이 별도로 있었다.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시험에서 상, 중, 하 중에 '하'를 받았었다.
'하'의 한자 시험 성적을 뒤로 난 다시 옆 동네에 있는 도신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곳에서 맞이한 4학년 담임선생님은 배드민턴 코치를 겸직하신 남자 선생님이셨다. 특별한 교육방식이 기억에 남는다. 네 명식 한 그룹이 되어 자리에 않히셨다. 갑자기 시험을 봐서 성적순으로 네 명의 자리 중 1번 자릴 채웠다. 1번 자리가 다 채워지면 2번 자리, 3번 자리, 4번 자리가 채워졌다. 서로 도와가면서 공부하라는 취지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갑자기 본 산수 쪽지시험으로 자리 배치가 다시 되었다. 당시 반장이었던 나는 그 쪽지 시험에서 문제를 많이 틀려서 2번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때 느낀 복잡한 심정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선생님이 일요일에 학생들에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라고 하셨다. 아이들과 모여서 일요일 점심 식당에서 라면을 사 먹는 재미로 도서관에 다녔었다. 그때 읽었던 책 중에 하나가 카프카의 '변신'이었다. 당시 나에겐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이 전국체전으로 한 달간 자리를 비워야 하셨었다. 다른 여자 선생님이 한 달간 우리를 가르치셨다. 그 선생님과 헤어지고 난 후 선생님을 만나겠다고 아이들과 선생님 댁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선생님은 만나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긴 기억이 난다. 5학년 1학기 때 난 부반장을 했다. 그리고 2학기 때는 반장도 했다. 그 학교에서는 그게 가능했었나 보다. 그런데, 난 반장을 온전히 못하고 11월경에 다시 전학을 가야 했다.
나의 마지막 5학년 겨울과 6학년을 보낸 학교는 새로 지은 아파트에 위치한 신설 초등학교였다. 학생들이 계속 전학을 와서 한 달 사이에 반이 분반되어 서로 울먹 거렸었다. 새로 전학 온 학교에서 반장 선거가 있었다. 난 지난 학교에서 반장을 하고 왔던 터라 반장선거에 출마했다. 그리고 한 표를 받았다. 내가 나를 찍은 한 표였다. 그렇게 5학년을 보내고 6학년이 되었다. 그 6학년 친구들도 어디에선가 다들 전학 온 친구들이었다. 신설된 초등학교 2회 졸업생으로 나는 아직도 몇몇 친구들과 반창회를 한다. 그리고, 난 다시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우리 아이들의 초등학교 선배가 되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네 곳의 학교를 다녀야 했던 나름의 사정은 있다. 아버지가 당시 건설경기 붐으로 열사의 나라 사우디 공사현장으로 가셨다. 그러면서 우리 집은 외할머니댁이 있으신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다가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그 당시에도 부산에서 조그마한 아파트를 팔고 서울에서는 변변한 전셋집 구하기도 힘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서울에서도 몇 번의 이사를 또 하게 된 것이다.
부산의 초등학교 친구들과는 헤어졌지만 초등학교 6학년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아직도 그 친구들을 만나면 우리는 어느덧 초등학교 6학년으로 돌아가서 그때 이야기를 한다. 추억을 회상할 수 있어서 좋다.
또 다행인 건 중, 고등학교는 전학을 가지 않고 스포츠머리로 6년을 같은 중, 고등학교를 다니고 졸업했다.
오랜만에 '특별한 나 찾기' 주제로 글을 쓴다. 여러 초등학교를 거치면서 내가 배운건 적응력이다. 지금도 잘은 못하지만 어떤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적응해서 지낸다. 잘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려서 문제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려웠던 점은 남 앞에 나서기 어려워하는 약간의 소심한 성격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린 시절 계속 바뀐 환경 속에서 적응하는데 에너지를 소모하다 보니 자신 있게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하는 힘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나마 나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게 공부하는 것이었다. 잘은 못하지만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만 했던 동기가 된 것이다.
그렇게 ‘프로 전학러’로 나의 초등학교 생활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환경이었다. 나이가 들어가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난 또 부족한 나를 보완하며 오늘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