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안 봤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한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러고 보니 지금 책 읽는 시간 아니냐고 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아이들은 읽던 책을 볼 생각도 없이 자기들끼리 잡담을 이어나갔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다가 도서이용공간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못 보던 안전놀이매트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한 아이가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때까지의 소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묵묵히 앉아 있던 아이는 중학생인 현호였다.
“현호야, 안녕. 오랜만이네.”
다행히 아직 센터에 남아 있는 것을 알고 더욱 반가운 마음으로 손을 흔들었다. 현호는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다가 말없이 책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오랜만에 만난 나를 무시하는 듯한 그 모습에 나는 솔직히 좀 당황했다. 그해 겨울에 일하는 동안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던 아이 중 한 명이 현호였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이에 현호는 책을 덮어 두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를 지나쳐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해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예정됐던 대로 봉사를 하기 위해 센터장과 생활지도사가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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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처럼 문제풀이를 해달라는 생활지도사의 지도로 나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뵙게 된 내 또래의 사회복무요원과 이삼 학년 아이들에게 간단하게 인사한 뒤에 세 개의 테이블 중 한 곳으로 가서 앉았다. 슬쩍 보니 현호는 비어 있는 첫 번째 테이블에서 혼자 종이접기를 하는 중이었다. 자꾸만 내게 말을 걸어오는 이학년 아이들과 수다를 떨거나 문제를 가르쳐주는 도중에도 등 돌린 채 앉아 있는 현호가 마음에 걸렸다. 방금 전에 현호가 나를 무시한 행동이 무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서운함의 표현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센터에 있던 아이들 중에서 내게 떠난다는 말을 직접 전해 들은 아이는 현호뿐이었다. 그때 현호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며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놀러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4학년이라서 바쁠 것 같긴 하지만, 여유가 있을 때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내 딴에는 그때 말한 ‘여유’가 생긴 게 지금이었는데, 그 말에 시간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복잡한 정서적인 의미도 포함돼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내가 생각했을 때도 좀 심했다 싶을 정도로 늦었으니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서 내가 맡아 가르친 아이들의 학습이 다 마무리될 무렵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능하다면 현호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할 것 같아서 첫 번째 테이블로 향했다. 거기서 혼자 종이접기를 하는 현호에게 무얼 접는지 물어보면서 말을 붙였다. 어쩌면 나를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예상과 다르게 현호는 ‘용이요’라고 순순히 말해주었다. 나도 선반 위에서 색종이를 가져와서 예전에 현호에게 배운 방식대로 용을 접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센터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는지,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현호는 특유의 느린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혹시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나 때문에 상처받은 게 아닌가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적어도 대화하는 동안에는 예전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서는 선생님도 시험을 다 쳤는지 물어오기도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사소한 얘기를 이어나가다가 나는 내가 쓴 편지글에 달린 현호의 댓글을 잘 봤다고도 말했다. 그때 현호가 좋은 추억 만들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전한 댓글을 보고 감동 받은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현호는 ‘그래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는데, 사실은 조금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