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몰라서 조금 긴장했는데, 기다려 보아도 그 외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한 아이가 침묵을 깨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물을 마시러 가자,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따라나섰다. 어쩌면 오랜 시간 집중하느라 좀이 쑤셨던 것인지도 몰랐다.
등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돌아보니 독서감상문을 마무리한 고학년 여자아이들 셋이 문을 열고 막 들어온 참이었다. 늘 셋이서 몰려다니며 힘없는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시비를 걸고 때로는 6학년 언니, 오빠들한테까지 대들기도 해서 기세 좋은 그들에게 예전에 ‘삼대장’이라는 별명을 내가 지어준 적이 있었다.
삼대장은 자기들끼리 희희낙락거리면서 현호에게 다가갔다. ‘오늘 시험은 잘 쳤어?’ ‘뭐 하고 있었어?’ ‘재미없게 왜 대답이 없어?’ 익숙하게 시비를 거는 투로 셋이서 번갈아 가며 말했다. 현호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계속 모른다고 하면서 대답을 피했다. 그럼에도 뭐가 재미있는지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 삼대장은 이번에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해씨 쌤, 오늘 어쩐 일로 왔어요?”
그중에서 가장 기가 세고 장난이 심한 세화의 질문에 나는 조금 고민했다. 놀림 받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어려움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센터장과 통화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은 솔직하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굳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마음만은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도 없진 않아서, 결국 예전처럼 농담하듯이 말하게 되었다.
“어, 그냥, 지나가다가 생각이 나서 왔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세화는 ‘아, 네...’라고 대답하다가 다시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이번 방학부터 센터에 다시 일하러 와요?”
세화의 말대로 다시 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번에는 아쉽게도 국가근로 장학생으로 선발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이유를 대서 솔직하게 말할까 하다가 혹시라도 세화가 실망할까 봐 이번에도 농담하듯 가볍게 말했다. 물론 어떻게 말하더라도 실망할만한 내용인 건 마찬가지고, 세화의 마음 또한 편해질 리가 없지만, 돌이켜보면 그때는 그런 자각을 깊게 하진 못했던 것 같다.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사실은 바쁜 사람이어서 이번에는 일하러 오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바쁜데... 그럼 여기 왜 왔어요?”
“뭐 하고 사나 궁금해서 한번 와 봤지.”
이번에도 농담 같은 말이었는데, 세화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여기가 궁금하다고 마음대로 와도 되는 곳이에요?”
그렇게 쏘아붙이는 세화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자각하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내 말이 본의 아니게 서운하게 들렸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어, 그건 아닌데......”
뭐라고 수습할 말을 찾으려던 차였는데, 세화는 기다리지 않았다.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듯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주위에 있던 현호와 저학년 아이들은 나를 쳐다보았고, 다른 두 아이는 세화를 부르며 덩달아 밖으로 나갔다. 내가 가만히 닫힌 문만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현호가 옆으로 다가왔다.
“방금 전에 세화가 싸가지 없게 말하지 않았어요?”
현호가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하려다가 괜히 현호까지 끌어들이게 되는 것 같아서 말을 삼갔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스마트폰을 꺼내서 괜히 시계를 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말해선 안 됐는데’라는 생각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