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이긴 하지만 아까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세화가 나를 예전처럼 친근하게 대했다고 생각해서 긴장을 좀 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세화가 예전에도 농담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아직 부재에 대해 깊게 받아들일 나이는 아니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나의 실수였다. 그동안의 오랜 공백 때문에 바로 떠올리지 못하긴 했지만, 사실은 모르지 않았다. 센터 내의 상당수의 아이들이 정든 선생님들과의 이별을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아무리 반복하더라도 그 일이 아이들에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때로는 상처로 남기도 한다는 것을.
물론 아이들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런 건 센터에서 일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기도 했다. 나 또한 국가근로 장학생 신분으로 파견되어 오긴 했지만, 그런 내가 봤을 때도 짧게는 삼 주(사회복지실습생)에서 길게는 두 달(국가근로 장학생) 가량 일하고 사라지는 외부 인력들이 아이들에게 꼭 좋은 영향만 주는 것 같진 않았다. 그들은 일하는 동안에는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것처럼 친하게 굴고, 헤어질 때는 또 주로 매달리는 저학년 아이들에게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섣부르게 약속했다. 그럼에도 다시 찾아오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거의 없었다. 약속한 아이들은 주변의 다른 선생님들에게 떠난 선생님이 언제 다시 오는지 물어보고, 이제까지 자신들에게 잘해 주고 간 선생님들의 순위를 정하기도 하면서 내심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그럴 때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센터에 몸담은 입장에서 찜찜한 기분을 느끼곤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재정이 열악한 지역아동센터에서는 외부인력들을 계속 쓸 수밖에 없고, 또 상당수의 저소득층, 한부모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집보다 아동센터에서 더 오랜 시간 생활하도록 둘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혹시 나 또한 아이들의 마음속에 불신이라는 안 좋은 감정을 심어주는데 일조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아마 그런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두에게 부재를 미리 알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글 쓰는데 특화된 전공을 조금이라도 살려서 장문의 편지를 쓴 것은. 아이들에게 받은 것들을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긴 시간 끝에 겨우 찾아온 것은. 물론 애초의 의도와 다르게 편지가 저학년 아이들의 마음에 크게 와닿은 것 같진 않지만. 내 딴에는 나름대로 노력했는데도 그와 무관하게 세화에게 상처를 주고, 현호에게도 쉽게 상쇄될 수 없는 실망감을 준 것 같긴 하지만. 그래서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옆에서 의자 빼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들의 학습지도를 마무리한 뒤에 줄곧 수험서를 보고 있던 사회복무요원이 일어나서 부엌으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세화에게 할 말을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다른 생각에 빠져있느라 알지 못했는데 어느덧 간식 준비할 시간이 된 듯했다.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지 부엌으로 가서 도와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이내 손에 쥐고 있던 색종이와 색연필을 내려놓았다. 애초에 아이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시 찾아온 것이 맞지만, 표면적으로는 봉사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일을 찾아서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그 생각이 옳은 줄 알았다.
결정을 후회하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하필 간식이 많은 날이라 사회복무요원과 함께 코코볼을 그릇에 담은 뒤 우유를 붓거나 후원받은 갖가지 빵들을 먹기 좋게 잘라서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둘이 들어가면 꽉 차는 공간에서 서로 몸이 부딪치지 않게끔 배려하다 보니 혼자일 때보다 오히려 능률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 문제풀이만 좀 해달라고 지시했던 생활지도사의 말도 뒤늦게 기억났다. 그러고 보니 그런 간편한 말에는 나머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하는데 더 써달라는 배려가 담겨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을 보니 어느덧 15분이나 지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더 후회되었지만, 도중에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결국 사회복무요원이 손 씻기를 지도하고 쟁반째 간식을 전하는 동안 뒷정리까지 다 하게 되었다. 어쩌면 오늘이 아이들을 만나는 마지막 날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더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아쉬움이 남는다면 다음에 또 오면 될 텐데도, 마음을 배반하듯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처럼 느껴졌다.
꼭 방금 전까지 겪은 일들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얼마간 영향을 받은 것 같긴 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설렘과 걱정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센터에 오고 나서 명확히 알게 된 것 같았다. 오늘처럼 아이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면 꾸준히 찾아와야만 할 텐데, 현재로서는 그럴 여건이 되진 않는다는 것을. 여름 방학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