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말을 전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 뒤로 지승이와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둘만 남은 상황에서 왠지 대화해야 할 것 같다는 약간의 조바심도 없진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남자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뛰노는 게 좀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승이는 세화가 왜 저러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대답한 뒤에 현재는 학원에 다니느라 센터에 오지 않는 친언니의 근황이나 최근에 할머니에게 회초리로 맞은 일,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에 대한 얘기를 쉼 없이 들려주었다. 나는 간혹 맞장구를 쳐주거나 마음상한 일들에 대해서 공감하는 말을 해주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지승이가 혹시라도 둘만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을 특별하게 여길까 봐 걱정을 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일련의 일들 때문에 누구든 내게 친밀감을 느낄수록 이후에 상처가 더 깊게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어느 순간에는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린 채 일부러 건성으로 듣는 척을 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표면적으로는 내가 지승이와 대화를 나누며 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축구하는 아이들도 굳이 내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시간이 지나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아이들을 한데 모아 인원 점검한 뒤에 함께 센터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애초에 약속돼 있었던 네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맞은편의 주방에서는 저녁 식사가 준비 되는 모양인지 문틈 사이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센터로 돌아와서부터 계속 산만하게 떠들고 있던 아이들은 사회복무요원의 지시에 따라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 앞에 한 줄로 서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줄을 서면서도 앞뒤로 장난치는 것을 보다가 나는 테이블 아래 있던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때 6학년들과 중학생들의 플롯 수업이 진행되고 있던 프로그램실의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온 것은 현호였다. 현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장 내게 다가왔다.
“선생님, 지금 갈 때 된 거 맞죠?”
이전에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현호는 봉사를 마치는 시간을 정확히 가늠해서 그렇게 물어보았다.
“어, 안 그래도 가려고 했지. 현호야 잘 지내...”
“네,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다음에도 꼭 오셨으면 좋겠어요.”
내게 신뢰를 보이는 듯한 그 말과 눈빛에 순간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우물쭈물하다가 ‘어, 그래. 또 올게.’라고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내게 고개 숙이며 인사한 현호가 다시 플롯 수업을 들으러 돌아간 뒤에 나는 곧장 유리문을 열고 나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찜찜한 기분이 계속 남아 있었다. 예전에 어린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떠난 선생님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생활지도사는 오늘 너무 수고 많으셨다고 하면서 내게 서류 한 장을 건네주었다. 봉사인정 포털에 등록하기 위한 신상 정보를 기입하고 나서 나는 다시 돌려주었다. 생활지도사가 조금 뜸 들이다가 내게 물어보았다.
“성우 선생님이 예전에 글 쓰신다고 얘기 들었던 것 같은데 맞나요?”
“네, 글쓰기를 배우는 학과여서요......”
나는 소설을 쓴다고 말하지 못하고 단지 그렇게 대답했다.
“실은 저희 아동센터 신문에 올릴 글이 필요한데,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떠나는 마당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그 제안을 듣는 순간 뜻밖에 발목이 잡히고 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침 예전에 내가 쓴 편지글을 아이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 더 마땅치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예전에 제가 카페에 써놓은 편지글이 있는데, 그걸로 혹시 대체하면 안 될까요?”
“네, 예전에 써주신 글은 저와 센터장님도 잘 읽어보았어요. 근데 제가 말씀드린 신문은 그달에 있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기제 하는 거라 예전 내용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른 두 명이 읽었는데도 정작 아이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나니 어딘가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성우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좋아해 주시고, 또 쓰시는데 얼마 안 걸리실 것 같아서 한번 여쭤 봐요. 저는 나이가 들어서 성우 선생님처럼 글을 잘 못 쓰겠더라고요.”
추측이긴 하지만 내가 대다수의 선생님들처럼 다음에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부러 알리지 않은 건 아닐까. 어쩌면 조금은 횡설수설하는 듯한 말 때문에 더 의심되었는지도 몰랐다.
“에이포 용지 반 바닥 정도면 되는데, 안 될까요?”
“네, 알겠어요. 그럼 한번 써 볼게요.”
나는 면전에서 거절 의사를 밝히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서 우선은 그렇게 말했다. 생활지도사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자신의 메일을 쓴 쪽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나는 이만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건너편 책상에 있던 센터장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성우 쌤, 이제 가는 거야? 마침 저녁 시간인데, 아이들이랑 밥이라도 같이 먹고 가지 그래.”
“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나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는 다시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럼 다음에도 시간 되면 또 봐요.”
센터장의 말에 나는 ‘네’라고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러고는 뒤돌아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이렇게 모든 일정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다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 동안에는 왠지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보람 같은 것은 조금도 없고 이상하게 허무한 마음만 남는 것 같았다. 왜 그런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단순히 한두 가지 간단한 이유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계단을 내려온 나는 현관에서 서둘러 신발을 갈아 신었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소음을 뒤로한 채 문밖으로 나왔다. 등 뒤에서 쫓아오거나 나를 부르는 아이들은 한 명도 없는데도 발걸음은 괜히 빨라졌다. 그러는 사이에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오늘 센터에 다시 찾아온 게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