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코인 Aug 21. 2021

못 쓴 글도 아름답다(2)

    

   돌아온 주에 다시 찾아온 어르신들은 모두 빠짐 없이 공책을 제출하셨다. 과제 검사를 하기 위해 빠르게 훑어보니 애초에 제시한 주제대로 써오지 않은 어르신이 두 분 계셨다. '어머니' '아버지'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긴 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각각 '전쟁의 참상'과 '불운한 혼인'을 주제로 쓴 글이었다. 사실 과제의 경우는 담당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구색맞추기로 마련한 것도 없지 않았기 때문에 꼭 틀에 맞추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었다. 문제는 과제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글들까지 포함하여 마지막 장까지 다 채워진 공책에 있었다. 나는 공책의 주인인 아버님께 열정이 대단하시다고 말하며 추켜세우다가 앞으로 남은 일수가 많은데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버님은 내가 빨리 썼으니까 내 글을 책에 더 많이 넣으면 되지 않겠냐고 하셨다. 예상치 못한 우기기에 당황했지만, 우선은 내 권한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팀장인 원우회장에게 한번 말해보겠다고 둘러댔다.


예상치 못한 일은 그 후로도 이어졌다. 어르신들에게 시와 소설 속의 좋은 문장을 발췌한 유인물을 나눠드리고나서 기발하고 다양한 표현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학습 시간의 일이었다. 지난 시간의 개별적인 면담을 통해 가장 가부장적인 면모를 갖고 계신다고 느껴졌던 아버님은 보는 둥 마는 둥 하시다가 불쑥 말하셨다.


  "우리 같은 늙은 사람들은 이제 와서 이런 거 배워봤자 써먹을 줄 몰라. 글 예쁘게 꾸미는 건 학생들이 알아서 해주면 되는 거 아닌가."


  사실 대학원생들끼리 짠 컬리큘럼에는 이론 학습 시간이 마련 돼 있지 않았다. 컬리큘럼대로라면 지금은 제출된 글들을 어르신들과 함께 돌려보고 합평을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 딴에는 단순한 시간 채우기 성격이 없지 않은 합평시간을 뒤로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라도 제대로 알려드리고자 따로 이론학습 시간을 마련한 것이었다. 설마 싫어하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다. 나는 서운한 마음을 숨긴 채 어렵게 느껴지실 줄 몰랐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화를 받고 계시던 어머님이 자리에서 불쑥 일어나셨다.


  "병원에 입원한 영감 때문에 나는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중간에 나가서 미안해."


  어머님은 그 말을 남기시고 황급히 떠나셨다. 서로의 느낀 점을 공유하며 본격적인 수업을 진행해보기도 전에 이미 두 분께서 참여 거부 의사를 밝히셨다고 생각하자 기운이 쭉 빠졌다. 수업을 마저 진행해야 할지 아니면 어르신들에게 더 배우고 싶은지 물어봐야 할지 고민 되었다. 한편으로는 멘티를 이끌어야 하는 멘토 입장에서 너무 눈치를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섵불리 입을 떼지 않아 다소 어색해진 순간에 다행히 담당자가 쉬는 시간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한숨 돌렸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다른 어머님이 내쪽으로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학생, 나 다른 팀으로 옮겨주면 안 돼"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요구인가 싶어서 이유를 물어보았다. 어머님은 열정이 넘치는 아버님과 병문안 가신 어머님과 같은 복지관에 다니는데,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당신만 대화에 끼지 못해 소외 받는 느낌이 든다고 하셨다. 어머님의 소외감과 무관하게 나는 앞으로 남은 회차를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쉬는 시간이 끝날 무렵에는 열정이 넘치는 아버님도 병원 진료를 이유로 일찍 가셨기 때문에 수업은 어쩔 수 없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새로 합평을 하기에도 애매하다고 판단하여 무리한 요구를 하신 어머님에게 왜 안 되는지를 설명하여 납득시켜드리다가 가부장적인 아버님과 우연히 정치문제에 관해 잡담을 나누는데 시간을 쓰게 되었다. 사실상 공식적인 일은 하지 않은 셈인데도 마칠 무렵에는 지치고 고된 느낌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