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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코인 Sep 19. 2021

(추천)그녀에게 예의 바르게 차이는 방법(1)

우리 사이가 그렇게 나빠질 줄 몰랐다

 (*본문의 글은 '그냥 알바로 여행한 셈 치겠습니다' 저서에 수록된 완성본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립니다.)



  그해 겨울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나는 우리 사이가 그렇게 나빠질 줄 몰랐다.

그녀는 나와 함께 일하게 된 직장 동료였다. 그녀와 내가 처음 마주친 것은 출근길의 버스 정류장에서였지만, 처음 대화를 나눈 것은 지역아동센터에서였다. 우리는 겨울 방학 동안 국가근로 대학생 신분으로 그곳에서 일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한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은 근무 첫날에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대면한 자리에서였다. 오전에 센터에 도착한 우리는 생활지도사에게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들은 뒤 일하기 전에 서로 말이라도 트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인 우리는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고 생활지도사의 주도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의 이름이나 나이 등의 정보들도 그때 듣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제외한 여자 선생님들 중에서 유일하게 나보다 어린 21살이었다. 함께 일하게 된 네 사람 중에서 나와 그녀만 같은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나 서로의 거주지가 비교적 가깝다는 사실도 소개말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생활지도사의 물음에 대답하는 말을 들어보니 내가 사는 자취방에서 그녀가 사는 부모님 집까지는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밖에 되지 않는 듯했다. 나는 우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다가 이렇게 멀리까지 오게 됐는지 궁금했다. 아마 그때부터 그녀의 존재를 전보다 더 의식하게 됐던 것 같다.


  “거리가 멀어서 둘 다 출퇴근하는 게 쉽진 않겠네.”


  생활지도사는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우려를 표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괜찮다고 말했다. 어쩌면 앞으로 계속 같은 버스를 타고 출퇴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 순간에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생활지도사는 선생님들의 신상정보가 기입된 서류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무언가 다른 일이 생각난 듯 얘기 좀 나누고 있으라고 하고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 맞다, 선생님 혹시 아까 저랑 같은 버스 타고 오시지 않으셨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사실 머릿속에서는 한 시간쯤 전에 그녀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버스에서 내리던 모습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앞서 나가던 모습이 생생했다. 그런데도 나는 사실과 다르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외모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을 혹시라도 알아챌까 봐 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펑퍼짐한 후드가 달린 옷에다가 큰 눈망울을 가진 그녀를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 네...”


  그녀는 내 싱거운 대답에 흥미를 잃은 듯 다른 선생님들처럼 스마트폰을 보았다. 나는 그녀의 작은 관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잠시 생각하다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어떻게 이렇게 멀리까지 오게 되셨어요?”


  분명 출퇴근을 하는 데 하루에 두 시간이 소요되는 거리는 원만한 여건이 아니었다. 나는 성적이 낮아서 경쟁이 덜 한 이곳을 선택했는데 막상 걸리고 나서는 조금 후회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국가근로를 지원한 게 처음이라 ‘우수기관’과 ‘일반기관’의 선발 원칙을 잘 몰랐다고 대답했다. 나는 처음이면 잘 모를 수 있다고, 나도 국가근로를 두 차례 해봤는데 늘 원하는 기관이 걸리지 않았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조건상으로는 애초에 나와 그녀가 만날 확률이 희박했는데도 서로의 작은 실수 때문에 만나게 됐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다행으로 느껴졌다.


 


  더는 대화할 소재가 없어서 모두가 스마트폰만 보는 사이에 저학년 아이들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등원했다. 사무실 밖으로 나온 생활지도사는 선생님들에게 수학 문제집 풀이부터 해달라고 지시했다. 아이들은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알아서 가져와 문제를 풀기 시작했고, 선생님들이 그 옆에 각자 자리를 잡으면서 첫날의 근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이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개념을 설명해주고 채점을 하는 도중에 나는 맞은편 테이블 쪽을 힐끔 보았다. 그곳에는 그녀가 아까와 다른 높은 목소리 톤으로 한 아이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천천히 구구단을 외우거나 틀린 문제를 고칠 때마다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모습이 상냥해 보였다.


  그 때문인지 나는 이후에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녀의 얼굴을 힐끔힐끔 보거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곤 했다. 머릿속으로는 아까까지만 해도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니까 서로가 만나게 된 계기가 겨우 작은 실수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나 같은 학교인 데다가 사는 지역도 비슷하다는 공통요소 같은 것들을. 아까와 다르게 이번에는 드문 행운이나 좋은 여건으로 여기면서. 그 덕분에 어쩌면 서로가 앞으로 좋은 인연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아마도 그때 나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그건 당시에 주변에서 어떤 기회든 좋은 인연이든 찾아오기를 늘 바라고 있었던 내게 그리 뜻밖의 감정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얼마 전에 좋아했던 사람에게 연락을 거절당한 일 때문에 더 몰입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 일은 그녀와 무관하긴 했지만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녀와의 만남을 더 좋은 기회로 여기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때만 하더라도 그런 식의 섣부른 생각이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져 오히려 그녀와 멀어지는 계기를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것은 분명 나의 큰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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