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날 이후로도 우리가 함께 앉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행운은 맨 뒤에 비어 있는 두 자리가 있는 경우에 한에서였다. 그곳에 두 자리가 없을 때 우리는 전처럼 바퀴 위 좌석이나 단독좌석에 각자 앉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가 왜 다른 승객들과 함께 앉는 맨 뒷좌석만 고집하는지 궁금했다.
지금에서야 그런 일말의 거리 두기는 단순히 나에 대한 의심과 경계의 반영이었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 나는 혼자 고민하다가 조금 다르게 추측했던 것 같다. 그녀가 나를 전보다는 가깝게 생각하는 게 분명하지만, 아직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연 것은 아니라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사적인 얘기는 잘 하지 않으려 하고 둘만 앉는 좌석에는 앉지 않는 것이라고. 어쩌면 과거에 안 좋은 사람에게 대인 경험이라도 있어서 내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계속 가늠해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런 추측에 무조건적인 확신을 가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할 때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차가운 마음을 녹이기 위해 오버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배려심을 보이는 것. 그녀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세심하게 신경 쓰는 것. 사실 그런 태도는 좋아하는 사람을 대할 때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중요한 태도이기도 했는데, 나는 그동안 망각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마음속에 되새기려 했는데, 정작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아마 일한 지 한 달이 지날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실수의 발단이 된 것은 그날 그녀가 버스에 오르면서 전한 짧은 말이었다.
“선생님, 오늘은 저 J대학교에서 내려요.”
나는 알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녀가 왜 내게 그렇게 알려준 것인지 궁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은 그녀가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예의상 전하곤 했던 짧은 인사말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에 나는 그녀도 내게 호감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와 그로 인한 감정에 도취돼 있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자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 말에는 혹시 나와 더 가까워지고자 하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담겨 있었을까. 혹시 오늘도 내릴 때 나에게 인사받길 조금이라도 바라서 미리 정보를 알려준 것은 아닐까. 실제로 그랬을지 어땠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녀가 이따가 J대학교에서 내리는 타이밍에 ‘주말 잘 보내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전에 염두에 두었던 세심함을 작게나마 선보일 기회라고 생각하며 기분 좋은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이어폰을 꺼냈다.
한참 동안 음악을 들으며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것은 창밖의 풍경이 조금 익숙하게 느껴질 무렵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이어폰을 빼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버스는 그녀가 말한 J대학교를 몇 정거장 지나서 내가 사는 구로 진입하고 있었다.
정류장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나는 발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답답함이 조금이라도 가실까 싶어서 세찬 맞바람이 부는 큰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최선을 다하기로 했으면서... 바보같이 왜 딴생각을 해가지고... 이런저런 자책을 하면서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발길을 다시 돌린 나는 카카오톡 앱에서 단체 대화방을 열었다. 초창기에 장학재단 홈페이지에 업로드 할 사진들을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뒤로 쭉 아무 말도 올라오지 않는 그 방에는 그녀도 포함돼 있었다. 나는 불쑥 개인 메시지를 보내면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문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미처 인사를 못 드려서 죄송해요. 잘 들어가시고, 주말 잘 보내세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가 버스에서 한 말에 대꾸한 것에 지나지 않는 내용이니 갑작스럽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보내지 않는 것보다는 보내는 게 더 자상해 보일 것이라는 계산도 없진 않았다.
그녀로부터 답장이 온 것은 그로부터 네 시간이 지나서였다.
‘배터리가 없었네요... 선생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그동안 마음속의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답장이 오기만을 내내 기다린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그때 하필 배터리가 없었다는 말을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어서 약간의 찜찜함을 느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