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서 그때 있었던 일을 다시 언급하게 된 것은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센터에서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나는 지난 금요일에 인사를 전하지 못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가뜩이나 그 순간에는 선생님들 중 누구도 선뜻 얘기하지 않은 탓에 딱딱해져 있던 분위기를 바꾸면 좋을 것 같다고 느끼던 차이기도 했다. 나는 버스 안에서 다른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는 주된 이유가 아닌 부차적인 이유를 들어 말했다.
“선생님, 그때 인사 못 드려서 죄송했어요. 어디서 내리는 줄을 몰라서요.”
물론 그때만 하더라도 그 일을 또다시 언급한 내 말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J대학교에서 내린다고 말했잖아요.”
그래서 그녀가 평소와 다르게 언성을 높여 말했을 때 조금 얼어붙고 말았다.
“J대학교 근처에 정류장이 많아서 헷갈리더라고요...”
그녀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다른 선생님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녀 쪽을 슬쩍 보았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적잖이 난감함을 느꼈다. 그녀는 나에게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시 문제집 풀이 시간이 됐을 때도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암만 생각해도 화가 난 이유를 몰라서 답답했다. 그렇지만 섣부르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인사만 제대로 했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게 계속 딴생각에 빠져서 채점도 빨리 하지 못하고 있다가 한 번은 문 너머로 짧은 대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선생님, 이것 좀 컴퓨터 있는 방에 갖다주시겠어요?”
상사의 부탁에 그녀가 ‘네’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그녀의 품 안에는 두꺼운 파일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선생님, 너무 무거워 보이네요. 이런 건 제가 들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파일들을 잡아 대신 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다가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겨진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것을 가져다 놓았다. 다시 돌아오고 나서는 그녀의 표정이나 잠깐의 머뭇거림 같은 것을 계속 떠올려 보게 되었다. 긍정적인 반응이 조금이라도 있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당장의 반응과 무관하게 방금 전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 화가 났는지 물어볼 수는 없으니까 그런 식의 행동으로 화해를 구하는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 나는 이후에도 고민하다가 다른 방식으로 도와주게 되었다. 한번은 간식 설거지를 하려고 하는 그녀의 손에서 고무장갑을 뺏어서 대신 설거지를 했고, 또 한 번은 대걸레로 막 청소하려고 하는 그녀에게 양말 젖지 말라는 뜻에서 무심하게 슬리퍼를 갖다주었다. 설마 그렇게 화해를 구하는 행동이 그녀에게 강요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에 조금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날 근무가 종료된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센터 밖으로 나온 뒤 그녀가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앞서 걸어가는 걸 보면서 나는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만 했다. 내가 뒤늦게 정류장에 도착한 타이밍에 맞춰서 그녀가 스마트폰을 꺼내 친구와 통화하는 모습을 봤을 때도 나는 약간의 서운한 감정만 느끼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행동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그녀의 진심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버스에 오르고 나서였다.
그것은 나로서는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그전까지 나라는 존재가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 잘 알지 못했던 나는 크게 긴장하지도 행동을 조심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먼저 창가 쪽에 앉는 걸 보고서 나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약간 설핏한 느낌과 함께 그녀의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 순간 나의 시선을 받은 그녀의 눈 주위가 파르르 떨렸다.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쉬는 것도 나는 보게 되었다. 이어서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는 모습도. 그녀는 자리마다 사람들이 다 차 있는 맨 앞쪽으로 걸어가서 손잡이를 잡고 섰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에서 쌓여 있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둔탁한 아픔을 느꼈다. 그녀가 내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사실은 그동안 나를 싫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