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한 말과 내 결정을 처음으로 조금 후회하게 된 것은 한 주가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사이에 나는 그녀가 센터에서 다시 눈에 띄게 밝은 표정을 짓고,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 쾌활하게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녀와 정서적 거리뿐만이 아니라 물리적 거리마저도 멀어졌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회복에 내가 일조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차라리 잘된 일로 여겼다. 그녀가 고통받지 않고 행복해지는 게 내가 바라던 일이었다고 생각하며 조금 뿌듯해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는 마냥 긍정적으로 봐지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놀이방에 있는 아이들과 부담 없이 잘 놀 수 있도록 재빨리 자리를 뜨거나 퇴근 시간에 그녀를 피해 아예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하는 순간순간에 나는 조금 찜찜함을 느꼈다. 언제부턴가 왜 자꾸 안 좋은 기분이 드는지 계속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분명 그런 식의 자발적인 격리는 그녀를 위한 배려임이 틀림없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유해한 사람으로 격하시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지금의 상황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한편으로는 날씨 때문에 더 안 좋은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무렵에는 퇴근 시간에 혹독한 날씨를 견디는 게 또 다른 큰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때 나는 예전과 다르게 매일 날씨 기사를 찾아보고 있었다. 퇴근 시간에 버스를 매일 20분 정도 더 기다리고, 출근 시간에도 누구보다 일찍 도착해서 상사가 올 때까지 문 앞에서 매번 기다리다 보니 날씨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40년 만의 최강 한파...’ ‘폭설로 인한 교통체증 우려돼...’ ‘노숙인 저체온증으로 사망...’과 같은 부정적인 내용의 기사들을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보다가 어느 날에는 중요한 기사 하나를 찾게 되었다. 그 기사는 최근에 유독 날씨가 더 추워진 이유가 러시아 우랄산맥 상공에 생겨난 고기압이 찬 대륙성 공기를 한반도 쪽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의 과학적인 맥락은 자세히 이해하지 못해도 하필 그 희귀 현상을 재수 없게도 이맘때 맞게 됐다는 사실은 알 것 같았다. 덕분에 그 이후로 날씨가 곧 풀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깨끗이 접게 되긴 했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삼 일 치 일당에 맞먹는 돈으로 구매한 겨울 패딩에 털목도리를 두른 채 냉혹한 한기를 덜덜 떨면서 견뎠다. 후회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나마 시간이 좀 더 지나서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조금 편하게 버틸 방법들을 모색해보긴 했다.
한 가지는 퇴근 시간이 됐을 때 빠뜨린 소지품이 있는지 오랫동안 확인하면서 짐을 챙기거나 괜히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보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추위뿐만이 아니라 그녀와의 접촉을 최대한 줄이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눈치가 보인다는 단점도 있었다. 늘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인사를 하며 센터 밖으로 나서던 내가 퇴근 시간마다 뭉그적거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생활지도사가 한번은 내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하고 같이 안 가세요?”
나는 그때 어색하게 웃으며 ‘화장실이 급해서...’라고 얼버무렸는데, 속으로는 적잖이 난감함을 느꼈다. 혹시 다른 곳에 있던 그녀가 그 말을 들었을까 봐 걱정도 되었고, 생활지도사가 혹시 다른 선생님들과 불화한다고 오해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였다. 그 뒤부터는 너무 오랫동안 화장실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삼가게 되었다.
다른 한 가지는 편의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는데, 그 또한 첫 번째 방법처럼 녹록지만은 않았다. 편의점이 센터에서 멀기도 했고, 막상 그곳에서 물건을 고르는 척하면서 가만히 있다 보면 기분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시간만 때우다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현실이 불만스럽게 느껴지다 보니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그녀도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식의 부정적인 생각이 든 적도 많았다. 나를 탓하는 건 괜찮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미워하게 된다면 가뜩이나 힘든 상황에서 마음이 더 괴로워질 것 같아서 그럴 때는 평소에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던 생각으로 애써 마음을 다잡곤 했다.
내가 이러는 건 그녀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다고. 그녀에게 한 번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나의 배려심을 늦게나마 전하고, 그럼으로써 미래에 더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고 뼈저리게 책임을 지는 것은 과거의 못난 나를 버리기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고. 그러니 지금은 이 시련을 견딜 필요가 있다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다 보면 복잡한 마음이 좀 가누어지는 듯했다. 아마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정신적으로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만약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어느 날 그녀가 있는 정류장으로 다시 갔더라면 끝나갈 무렵에 그녀의 호의를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