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던 그 기간 동안 나와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던 그녀가 불쑥 말을 걸어온 것은 근무가 끝나기 불과 하루 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매일 찬 바람을 오래 쐰 탓에 걸린 감기가 며칠 째 떨어지지 않아 마스크에다 목도리까지 맨 채 문제집 풀이를 해주고 있었다. 그저께 병원에 가서 약을 타 먹었는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어서 그냥 하루만 푹 쉴까 하다가 함께 일을 분담하는 그녀와 다른 선생님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도 들어서 억지로 나와 일을 하던 중이었다.
“선생님, 혹시 잠깐 시간 있으세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례라도 들린 듯 콜록거리면서 무슨 일 때문이시냐고 물었다.
“괜찮으시면 잠시 저랑 같이 가요. 드릴 게 있어서 그래요.”
갑작스럽게 줄 것이 있다는 말과 그 상냥한 목소리에 조금 동요했지만, 보나 마나 일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긴장된 마음으로 그녀를 따라 다른 방으로 들어가 보니 이제 막 도착한 저학년 아이들이 책가방과 겉옷을 소란스럽게 사물함에 집어넣느라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했다. 그녀가 아이들을 피해서 다가간 테이블 앞에 한 아이가 포장된 초콜릿을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민아가 선생님들 가기 전에 주려고 집에서 만들어 왔대요. 이건 선생님 거래요.”
그녀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여러 개의 초콜릿 중 하나를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나는 그때까지도 수줍게 포장용 리본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아이와 그녀에게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건너편 방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지나서 책상 위에 가득 쌓인 문제집에 채점하는 동안에도 그 일이 계속 상기 되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별일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고개 숙이며 전한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굳이 나를 건너편 방으로 데리고 간 뒤에 직접 초콜릿을 건네주는 수고스러운 일을 한 것에 대해 나는 정말로 감사함을 느꼈다. 적어도 그전까지 그녀가 내게 다시 말을 걸어오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한편으로는 어떤 이유로 그녀가 다시 나와 말을 하기로 한 것인지 궁금했다. 그녀의 생각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그동안 내가 계속 거리를 두었던 게 그녀가 경계심을 푸는 변화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보게 되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다음 날이 되어서였다.
*
정확히는 퇴근 시간의 일이었다. 그날은 근무 마지막 날이기도 해서 일을 마친 이후에 다 함께 회식을 하러 가게 되었다. 센터장이 그동안 고생한 대학생 선생님들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회식을 선물해 주겠다고 한 것이다.
함께 한 사람 중 누구도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회식 장소인 돈가스식당에 들어갔을 때 나는 어쩌다 보니 그녀 옆에 앉게 되었다. 다른 선생님께 자리를 바꿔 달라고 말해야 했을까, 생각하면서 처음에는 조금 걱정했는데 막상 그녀는 나를 크게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내게 무엇을 먹을 건지 먼저 물어보거나 내가 센터장에게 홀가분하면서도 아쉽다는 내용의 소회를 말할 때 옆에서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하는 것으로 보아 나를 다른 선생님들과 다름없는 동료로 대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시간이 지나 집에 돌아갈 때가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도 17번 버스 타고 가시는 거 맞죠?”
그녀가 그렇게 물은 것은 일행들과 인사를 하고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둘만 있을 때는 다 함께 있을 때와 또 다를 것이라 생각한 나는 처음에 말없이 함께 가다가 서서히 뒤처져서 걷기 시작했는데, 그때 그녀가 뒤돌아서 얘기한 것이다.
나는 그렇다고 말하며 다소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직장인들의 퇴근시간이라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버스에 대해 괜히 말을 꺼냈다. 그녀는 스마트폰 앱으로 남은 시간을 보면서 함께 우려를 표했다. 그렇게 해서 가까운 정류장에 도착한 뒤에도 우리는 모처럼 오늘 있었던 사소한 일들로 계속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다. 잠깐의 침묵 이후에는 유독 추웠던 올해 겨울 날씨에 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때마침 생각난 듯 조심스럽게 내게 물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