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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코인 Sep 19. 2021

(추천)그녀에게 예의 바르게 차이는 방법(8)

순간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멈칫했다. 그 말과 함께 유독 조심스러운 표정을 보고 어렴풋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에 그녀가 뒤처지던 나를 붙잡기라도 하듯이 일부러 말을 건 이유를. 아마도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내가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기 위해 추위에 떨며 고생한 것을. 역시 그녀는 좋은 사람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쩌면 그동안 본의 아니게 미안하고 찜찜한 감정을 심어주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뇨. 힘든 건 전혀 없었어요. 선생님들께서 각자 일을 잘 해주셔서 제가 도움을 받았던 것 같아요. 말 안 듣는 아이들도 다 귀엽고 좋았어요.”


  그 뒤로 우리는 기억에 남았던 아이들과의 추억이나 준비하느라 고생했던 안전교육과 놀이 활동들. 그리고 선생님들이 떠난다고 했을 때 눈물을 흘렸던 몇몇 아이들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마치 우리 사이에 아무 문제도 없었던 예전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고즈넉한 기분을 느꼈다. 혹독한 겨울 동안 고생한 것을 조금은 보상받는 경험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정신이 팔려 있느라 오랜만에 만끽한 기쁨이 이후에 속절없이 고통으로 바뀌게 될 줄은 몰랐다.


  


  다 좋았던 그녀와의 대화가 아쉽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버스에 오르고 나서였다. 버스에 가득 찬 승객들 때문에 그녀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게 된 나는 이제 더는 대화하거나 만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자각하게 되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녀와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내부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어느 순간에는 근거 없는 무분별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도 했다. 사실은 그녀도 나와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서 어제와 오늘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온 건 아닐까. 같은 인문대이기도 하니까 혹시 점심시간에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해도 괜찮을까. 그게 좀 그러면 혹시 도서관공부 스터디를 함께 할 생각은 없냐고 제안해 볼까.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런 생각들과 조급한 마음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 어느 정류장에서 승객들이 우르르 내리면서 앞쪽에 앉은 그녀의 뒷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는데, 나와의 이별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태평하게 졸고 있었다. 머리가 창문에 계속 부딪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은 조금도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 이후로 덕분에 나는 부질없는 생각을 접게 되었다. 다시 말짱해진 정신으로 만약 정말로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더라면 어땠을지 생각하자 조금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녀가 혐오감을 드러내듯이 얼굴을 찌푸리던 장면이 다시 떠오르는 듯했다. 다시 그녀의 냉대와 미움을 받게 되는 것은 상상만 해도 겁이 나는 일이었다. 한 달 동안 고생해서 그녀와 다시 좋은 동료 사이가 되었는데 한 번의 실수로 그것을 다시 무위로 돌릴 수는 없었다. 나는 잠깐의 방심으로 다시 욕망의 지배에 놀아난 것이 부끄러워서 자책하듯이 스스로의 뺨을 때렸다.

  그러다가 주위에서 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조용히 손을 내렸다. 어느덧 그녀가 내리는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정류장 알림 메시지가 나오는데도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예전에 한번 그녀를 깨울 때처럼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입 주위를 닦으면서 잠이 깬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황급히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때마침 불이 바뀐 횡단보도를 서둘러 내달렸다. 그녀가 사라진 뒤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는 동안 나는 일련의 모습들을 떠올려보았다. 혹시라도 연기라고 생각될 만한 점은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헤어진 것이 조금 허탈하게 느껴졌다. 조금 멍하게 있는 사이에 스마트폰이 울렸다. 뜻밖에도 그녀의 문자메시지였다.


  “선생님, 깨워주셔서 감사해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고 늘 잘 지내세요.”


  그것을 읽는 순간 마음이 조금은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라고 생각하자 한편으로는 머릿속이 또다시 분주해졌다. 이걸로 관계가 끝난다면 나에게 남는 게 뭘까. 사람 일이란 건 또 모르니까 희박한 확률에 한 번 걸어보기라도 할까. 다 끝난 마당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만나자고 한번 제안하는 게 낫지 않을까. 잿더미에서 살아난 불씨처럼 또다시 그녀를 향한 마음이 자라나는 걸 느꼈다. 그것이 부질없는 욕망이라는 것을 자각하고는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남는 게 없긴 왜 없냐고, 그녀에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경험이 남는 게 아니겠냐고, 좋게 마무리를 지어야 지나고 나서 기억했을 때도 추억으로 남는 게 아니겠냐고 생각하면서 짧게 문자를 입력했다.


  “네, 선생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잘 들어가시고 늘 행복하세요~!”


  그리고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정말 추억으로 남는 것만으로 괜찮을까. 그런 의문이 마지막으로 들 때 즈음 정신을 차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릴 정류장이 이미 몇 개나 지나 있었다.


  나는 쌀쌀한 밤거리를 걸으면서 자꾸만 휴대폰을 보게 되었다. 혹시라도 문자가 한 번 더 오지 않을까, 하고 아주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아니었다. 입 밖으로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잘한 일이었는지 생각하다가 그 이후로도 또 은연중에 기다려 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뒤로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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