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글은 '그냥 알바로 여행한 셈 치겠습니다' 저서에 수록된 완성본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립니다.)
고등학교 삼학년 겨울에 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요즘처럼 누구나 다 쉽게 대학에 진학하는 시절에는 집안 사정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포기하는 경우가 드물고,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도 있지만, 우리 집은 예외였다. 12월 중순까지 꼭 입금해야만 하는 대학등록금 얘기를 아빠에게 처음 꺼내고 얼마 뒤에 있었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늦은 시간에 엄마가 귀가하자마자 욕설과 함께 윽박지르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인마, 3천만 원 언제 가져올 건데."
"누가 안 준댔어? 내년에 성공하면 갚는다고."
"내년? 지금 대학 등록금 내야 한다 안 하나."
"일단 모아둔 걸로 내 줘 봐. 지금은 없으니까."
"니 대출해간 거 다 어디 갔는데."
언성이 높아지는 둘의 대화를 통해서 나는 곧이어 알게 되었다. 수년 전부터 화장품, 휴대폰, 건강 매트 등의 다단계를 전전하고 있었던 엄마가 최근에 집 담보 대출로 3천 만 원의 빚을 졌다는 사실을. 손가락과 허리에 산업재해를 당한 탓에 오랫동안 고정적인 직장을 갖지 못한 아빠에게는 저축해 둔 돈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엄마와 아빠 모두 400만 원 가까이 되는 등록금을 지불하기 싫어서 서로 미루고 있다는 사실을.
"난 못 준다. 네가 가져갔으니까 네가 내라 인마."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서 그것도 마련 못 해줘?"
그렇게 밤새 서로에 대한 비난이 오가기만 할 뿐, 둘의 의견 차이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인연을 끊기라도 하듯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더욱 속이 탔다. 추가모집으로 겨우 합격한 탓에 가뜩이나 입금 기한이 짧아서 더 그랬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입금 기한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을 때까지도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면 엄마는 아빠한테 말해보라고 할 뿐이었다. 아빠가 태평하게 잠만 자고 있다고 하면 엄마는 한 번도 가족 품 떠나 보지 않은 네가 타지에서 자취를 어떻게 할 수 있겠냐며 딴소리를 하거나 내년에 떼부자 되면 빚 다 갚고 대학도 보내줄 테니까 두고 보라는 식의 허황된 말을 내뱉고는 끝내는 바쁘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런 식의 무익한 대화가 마감 기한을 불과 몇 시간밖에 남겨두지 않을 때까지 몇 차례 더 반복되었다. 그렇지만 사실 초조함을 느낀 건 엄마 때문은 아니었다.
사기꾼들에게 세뇌당해서 정신이 이상해진 엄마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아빠까지 무책임하게 계속 가만히 있는 모습은 좀 낯설었다. 분명 오늘이 마감 기한인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아빠는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낸 큰아버지에게 빌려보려는 최후의 시도도 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티브이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아빠는 내가 타지의 이름 모를 대학에 다니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게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수능을 망친 누나가 집 근처에 있는 그저 그런 대학에 진학했을 때 몇 날 며칠에 걸쳐 술을 마시며 비난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주기 싫은 대학 등록금뿐 아니라 거기에 맞먹을 정도로 비싼 보증금과 월세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엄두가 나지 않는지도 몰랐다.
나는 아빠가 자는 방문 앞을 몇 차례 서성이다가 그만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도 내가 진학하길 바라지 않는 대학을 막대한 돈을 구걸하면서까지 다녀야 한다는 게 좀처럼 내키지 않았다. 갈 수 있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합리화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그다지 다니고 싶은 대학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