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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코인 Nov 14. 2021

스무살의 은둔형 외톨이와 화해할 수 있을까(2)

  결국 나는 그해에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일차적인 이유는 집에 돈이 없기 때문이었으므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게 맞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괜히 내 처지가 불행하게 느껴지면서 서러운 감정이 북받쳤다. 차라리 절반 정도는 자발적인 선택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속 편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등록금을 나 몰라라 한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아빠는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지를 묻기는커녕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미안하다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아예 없던 일인 것처럼 무심하게 구는 태도가 기분 나빠서 나는 대화 자체를 하지 않기로 했다. 아빠가 주방에서 혼자 밥을 차려 먹는 소리가 들리면 의도적으로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쩌다 화장실에 가다가 아빠와 스치기라도 하는 순간에는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빠와 다르게 엄마와는 할 말을 주고받았지만, 짜증 섞인 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길거리에서 쓸데없는 가구들이나 화분들을 주워서 거실에 들여놓거나 가망도 없는 다단계 사업을 신개념 네트워크 마케팅이라고 우기며 앨빈 토플러의 제 삼의 물결에 빗대 설명하려고 할 때마다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때로는 성질이 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지나가면서 괜히 엉덩이를 걷어차거나 탈모가 진행된 휑한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되는 일이지만, 당시에 어떻게 해서든 삐뚤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내 행동을 정당화했던 것 같다. 스무 살에 그런 큰일을 겪고 나서 이전과 똑같이 살아간다면 꼬여버린 내 인생이 어떤 의미도 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것만 같아서 나는 차라리 확 변해버리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부모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성인군자는 못 되니까 부모를 원망하면서 더는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쪽으로 변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대학에 가지 않은 마당에 당장 남아도는 건 시간이었으므로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데 주저함은 없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난생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이었다. 부모를 욕하고 증오하면서 동시에 손을 벌린다는 건 말이 안 되므로 돈을 벌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이참에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서 살고 싶기도 했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르바이트를 구하면서 알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구해질 줄 알고 카페, 피씨방, 식당 아르바이트에 지원했지만 번번이 낙방을 거듭했다. 당시의 어둡고 주눅 든 표정이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내심 하긴 했지만, 의지만으로 고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야간 알바생을 급하게 구하는 편의점에 운 좋게 테스트를 보러 간 적 있었다. 내 기준에는 손님들은 적은 데 자유시간은 많은 꿈의 아르바이트여서 어떻게 해서든 채용되고 싶었지만, 사수에게 일을 배운지 2시간 만에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막상 카운터 앞에 혼자 서보니 손님들이 혹시라도 느려터진 나를 비난할까 봐 무서웠다. 처음에는 친절하게 알려주던 사수가 나중에는 왜 한번 말한 걸 똑바로 기억하지 못하냐면서 언성을 높였을 때는 압박감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어느 상하 관계에서든 흔히 있는 꾸지람 정도였지만, 당시에는 어떤 비난의 말도 참고 인내할 수 없을 만큼 이미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던 게 문제였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스스로의 나약함에 적잖이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당장 아르바이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기대치를 확 낮춰서 이 정도면 나 같은 못난 인간도 할 수 있겠다 싶은 구인 모집 글을 물색했다. 그래서 고르게 된 게 집 근처에 있는 독서실 총무 아르바이트였다.


  급여는 한 달에 150시간을 일하고 고작 25만 원을 받는 수준이었다. 당시에 시급이 5천 원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적은 액수였다.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주인아주머니에게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별다른 질의응답도 없이 바로 채용되었다.


  다음 날부터 나와서 일을 배워보니 사실 그 아르바이트는 '채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민망한 정도이긴 했다. 온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인사하기, 어쩌다가 손님들에게 계산과 자리배정 해주기, 마감 시간에 간단한 청소와 문단속하기가 다였다. 그 외의 시간에는 카운터 자리에 있는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앉아 있기만 하면 되었다. '취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자리 '배정'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아르바이트였다.


  애초에 희망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식료품비 정도는 충분히 벌 수 있는 점이나 자유시간이 많은 점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그다음 날부터 계속 나오게 되었다. 독서실답게 모든 손님이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있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홀에 적막만 감돌았고, 그럴 때 내가 주로 한 일은 컴퓨터로 장편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무 계획도 목표도 없이 살고 싶진 않아서 차츰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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