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에 내가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은 공모전은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청소년 문학상'이었다. 이름이 '청소년 문학상'이긴 하지만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은 아니고, 청소년을 위한 장편소설을 모집한다는 의미였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으므로 역대 수상자들도 국문과나 문창과를 졸업한 데다가 아이를 길러본 경험까지 있는 노련한 30~40대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평균 경쟁률은 100대 1 이상으로 장편소설 공모전치고는 꽤 많은 편이었다.
단순히 수상자들의 면면이나 높은 경쟁률만 놓고 본다면 갓 스무 살에 대학도 가지 못한 내가 당선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을 것이다. 당시의 나도 힘들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청소년의 마음은 이제 막 청소년 시기를 지나온 내가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작년에 학교폭력을 소재로 신문사에 소설을 투고해서 청소년 부문 상(경쟁률이 15대 1밖에 되지 않았다)을 받은 것 때문에 쓸데없이 자신감에 차 있기도 했다. 최연소로 당선되어 2천만 원의 상금을 거머쥔다면 대학에 가지 못한 시간을 보상받고도 남을 것 같았다. 영광의 순간을 상상하면 할수록 희망으로 마음이 벅차오르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만 해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사실은 평범하고 능력 있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큰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희망에 더 목을 맨다는 것을. 그런 사람에게는 희망만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가 된다는 것을.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에 학교 과제를 하다가 일본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본 적 있다. 거기에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47세 남자가 등장했다. 남자는 오래전에 돈을 빌려 창업한 소프트웨어 회사가 망한 이후로 세상을 등진 채 부모님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그 뒤로 20년 가까이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한 신세가 되었는데, 어느 날에는 참다못한 부모가 대안학교 직원들을 대동해 아들의 방문을 강제로 부수고 들어갔다. 한참 동안 괴성을 지르며 짜증을 내던 남자가 이윽고 잠잠해졌을 때 상담사가 그동안 무얼 하고 있냐고 물었다. 자칭 프로그래머인 남자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 소프트웨어를 오랫동안 개발하고 있었다고, 밤낮없이 작업해야만 하므로 직장을 다닐 수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에 상담사는 남자에게 직접 알려주진 않았지만, 시청자들에게는 헛된 희망을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스스로 믿어버리는 것이 은둔형 외톨이들의 공통점이라고 내레이션으로 설명했다. 그 순간에 화면 밖의 나는 조금은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꼭 스무 살의 이해할 수 없었던 나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독서실에서 일하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그 남자처럼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지냈던 것 같다. 남자와 다르게 집 밖에서 약간의 경제 활동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엄연히 사회생활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입구를 들락거리는 손님들이나 주인아주머니에게 의무적인 인사를 건넬 때를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집에 있을 때도 유일한 대화 가능 상대인 엄마와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내 방 한구석에 가득 쌓여 있던 엄마의 서류 상자들과 옷가지들을 죄다 버렸다. 혼자 요리해서 차린 밥과 음식들은 늘 방안에서 먹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대리운전하고 새벽에 돌아오는 아빠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오전 6시까지 독서실에 머물다가 귀가하곤 했다.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는 혼자만의 일상이었지만, 그래도 인간은 역시 사회적인 동물이어서 이따금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손님들이 퇴실한 시간대에 방 안으로 들어가 책상 벽면이나 포스트잇에 적힌 소망하는 말들 혹은 세상에 대한 비난의 말들을 발견하고 나서 혼자 키득거리기도 하고, 호기심에 여자 손님이 걸어둔 무릎 담요의 퀘퀘한 냄새를 맡으면서 왠지 모를 고즈넉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인사를 하면서 한 번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었던 손님들의 얼굴이 궁금해서 허락 없이 번호들을 저장한 뒤에 카톡 프로필 사진들을 넘겨다보면 그들과 조금은 아는 사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가끔 스스로의 행동이 비이성적으로 느껴져서 이렇게 사는 게 과연 맞는지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잘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애써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외로움에 초연한 편이라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사람 만나는데 쓰는 시간을 온전히 글 속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구축하는데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애써 자부심을 가지려고 했다. 사람을 만나지 않다 보니 당연히 내가 쓴 글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고, 굳이 내가 이제껏 쓴 방대한 분량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계획한 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은 처음부터 다시 읽고 나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을 발견하게 될까 봐, 그러면 수상 가능성에서 멀어지는 현실을 마주하게 될까 봐 두려워서 되돌아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남들의 객관적인 시각과 의견을 배제한 채 오로지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서 쓴 글이 결코 좋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뒤늦게 이제껏 글을 잘못 써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뜻밖의 사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