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을 지나 점점 푸르게' 필사
사회가 정답이라고 규정짓는 가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자기 계발서는 빛의 속도로 사회가 정한 성공의 기준에 걸맞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쏟아낸다. 한 사회에서 다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는 사실 사회의 구조를 현재와 같이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배자를 위한 가치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개인은 사회가 자신에게 특정한 가치를 믿도록 강제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회가 개인에게 주입하는 신념을 무의식적으로 흡수해서 내면화한다.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달성해야 하는 절대 법칙처럼 사회가 요구한 규칙에 따라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노력한다.
사회의 다수가 그렇다고 믿으면 그것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그것을 사실로 인식한다. 지금 우리가 너무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 이를테면 여성의 참정권이나 노예제도의 불합리성, 피부색으로 인종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것과 LGBTQ에 대한 차별 등은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너무 당연한 것들이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특별히 부도덕하고 못된 사람들이라 그런 게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당연히 그러하다고 교육받았고 믿었기 때문에 굳이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솔로몬 애쉬는 선의 길이를 비교하는 간단한 문제를 통해 사람들이 얼마나 집단의 의견에 취약한지를 실험했다. 정답률이 99%에 달하는 쉬운 문제였지만,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오답을 말하자 정답률은 급속히 떨어졌다. 이 실험은 18번 시행되었는데 한 번도 틀리지 않게 답한 사람은 불과 24%밖에 되지 않았다. 정답이 아주 확실한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렇게 타인의 의견에 영향을 받는다. 정답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삶의 선택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회가 주입한 성공의 기준을 내면화하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자신을 가스라이팅한다. 남이 하는 가스라이팅보다 무서운 건 스스로에게 하는 가스라이팅이다. 나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 가스라이팅하며 나를 사회가 원하는 이상적인 사회인의 모습에 욱여넣지 않기로 했다. 내가 존재하고 싶은 대로 존재했는데 우연히 사회가 원하는 트렌드와 잘 맞아 성공한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사회적 성공을 위해 나의 기질과 가치를 타협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어찌 보면 내 맘대로 살겠다는 굳건한 다짐일지도 모르겠다.
이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성공을 조금은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된다.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보는 대신, 성공이 마냥 성공이 아니고 실패도 마냥 실패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이 관점으로 나는 삶을 살아가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먼저 내가 타고난 기질과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기질이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다. 이때 개인은 자신의 타고난 성향을 바꾸거나 애써 자신이 아닌 척 연기할 필요 없이 사회적인 성공과 동시에 개인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아마도 1% 미만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일론 머스크나 자신의 음악을 통해 성공한 뮤지션 같은 사람이 이 카테고리에 속할 것이다. 나는 일론 머스크를 좋아하는데 그가 가장 부자여서도, 세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을 만들어서도 아니다. 나는 그가 세계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고 가장 혁신적인 기업을 운영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자신만의 '또라이' 같은 기질을 간직하며 타협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만약 그가 1,000년 전에 태어났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팝 스타와 안무가를 생각해 봐도 그렇다. 수백 년 전, 아니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예술적인 끼를 가진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성공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기껏해야 악단에서 양반들을 위한 흥을 돋우는 역할, 여자라면 기생이 그들의 끼를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끼가 있다면 국경을 가리지 않고 인기를 얻고 팬덤을 구축할 수 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면 돈 역시 저절로 따라온다. 이렇게 한 사람의 성공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시대적 요구가 만났을 때 빛을 발한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은 여기에 속하지 못한다. 개인이 가진 고유함은 한 시대가 포용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두 번째 선택을 할 수 있다. 자신이 원래 타고난 기질과 재능은 무시하고, 시대적 트렌드에 자신을 욱여넣는 것이다. 사회가 제시하는 정답이 자기가 원하는 삶이라 스스로 세뇌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맞추고 때로는 갈아 넣는다. 나 역시 여기에 속해 있었고, 사실 지금도 어느 정도 발을 걸치고 있다. 물론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이제는 여기에서 좀 빠져나오려 하는 중이지만 말이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세뇌하며 셀프 가스라이팅을 하는 데 선수급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의사가 유행하면 어렸을 적 보았던 드라마를 떠올리며 그때부터 내 꿈은 의사였다고, 내 꿈은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이라 세뇌를 하고 교사가 유행하며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교사가 되는 것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자신을 세뇌한다. 이런 세뇌 작업은 너무 교묘하고 무의식적이라 알아차리기가 너무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사회에서 정하는 평균에 맞추는 것이 행복해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렇게 살기 위해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자신의 생명력을 잃어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자기가 태어난 모양대로, 자신만의 고유한 기질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때 삶이 예술이 된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가장 불운하지만,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사람들 아닐까? 이 사람들은 누군가에게는 이단아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루저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라이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안다. 그렇게 사는 것만이 자신답게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물론 먹고살아야 하기에 어느 정도 타협을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에게는 사회적 가치나 기준보다는 자기가 정한 가치나 기준이 훨씬 중요하다. 그래서 남의 말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고, 고집불통처럼 보이기도 하며 때때로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좋다'라고 여겨지는 룰을 따르지 않으니 때로는 사회부적응자로 보이기도 하고, 무능하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사실 이 모든 비판을 견디면서도 이 카테고리에 남아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마지막 카테고리에 속한 사람 중 드물게 성공한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건 그들이 변했다기보다는 끊임없이 변하는 사회의 트렌드가 어쩌다 우연히 이들이 속해 있고 추구하는 가치와 합이 맞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한 번 사회적 성공을 맛본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시대적 트렌드에 자신을 끼워 맞추며 자기가 경험했던 성공을 이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카테고리에 속했던 사람들이 시대적 변화에 맞춰 첫 번째 카테고리에 잠시 속하는 성공을 맛본 후, 다시 세 번째 카테고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두 번째 카테고리로 이동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반짝거리던 사람들의 눈에서 반짝거림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꽤나 슬픈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경고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하면 세 번째 카테고리에 속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 그러다 시대적 트렌드가 잘 맞으면 잠깐 첫 번째 카테고리에 속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겠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곧 다시 세 번째 카테고리로 가볍게 낙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실 말은 쉬워도 엄청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나 삶의 방식이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방식이 아님에도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아주 명료하게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남이 뭐라든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자존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 마음대로 살기로 했지만 그래도 종종 '이렇게 내 맘대로 살다가 인생 망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이 불쑥 올라올 때가 있다. 다행히 그럴 때마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인생의 스승들이 있다. 내가 불안할 때 떠올리는 스승들은 붓다, 예수, 니체, 소로우, 에피쿠로스, 니어링 부부 등인데 이들이 공통점은 모두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기득권, 사회가 옳다고 이야기하는 삶의 방식에 순응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붓다는 당시 기득권이었던 힌두교의 철저한 계급주의와 고행주의를 비판하며 계급에 상관없이 출가를 허용했다. 뿐만 아니라 남녀차별이 극심했던 당시 시대로는 파격적으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기도 했다. 예수 역시 당시 기득권이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율법주의에 집착해서 진정한 신앙의 의미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며 비판했다. 200여 년 전을 살았던 소로우의 삶을 통해서도 용기를 얻는다. 소로우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고, 원한다면 좋은 회사에 취업하거나 사업을 해서 부와 명예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사회적 성공을 좇을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를 마주하고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몸을 쓰는 노동과 자급자족으로 삶을 꾸려갔다.
나는 이들에 비하면 여전히 많은 것들을 타협하며 살아가지만, 이들의 삶을 비춰보며 좀 더 사회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좀 더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을, 결국 내 삶을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 마음대로 산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 일하고, 남은 시간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요가를 한다. 텃밭에 있는 재료들을 모아서 이것저것 나만의 요리를 한다. 밥 먹으러 오는 길냥이 밥을 준다. 자연을 바라보며 멍을 때린다. 있는 그대로 보며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을 쓴다. 효율성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시간이지만, 이 시간이 존재함으로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 번아웃을 지나 점점 푸르게 中 (김은지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