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맞추지 않아도 된다 / 거짓말하지 않으면 친구가 없다
언제부턴가 주위 눈치를 보는 사랑이에게 궁금해졌다.
가족들끼리 있을 때는 평소와 다름이 없는 것 같은데 외출만 하면 눈치를 지나치게 보면서
사람들을 피하는 과도한 몸짓과 대화를 하려고 말을 하면 쉿! 조용히 해야 한다면서 눈치를 준다.
이런 곳에서는 떠들어도 되는 거야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피해 주면 안 돼!
아니 쇼핑몰에서 소리를 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대화를 하는 정도의 소리에도 그것이 피해를
주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랑이가 의문이었다.
원래 저렇게 눈치를 보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저렇게 변한 것일까?
예의를 중시하는 가정적인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눅이 들정도로
저렇게 심하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3년 만에 만나는 공항출구에서 나에게 달려오다가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걸어오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때는 쑥스러워서 그런가 하고 별생각 없었지만 쇼핑몰에서 극도로 사람들을 피하고 말조차
못하게 하는 모습에 이상해서 물어봤다.
그냥 오른쪽으로 가려다가 사람이 있어서 멈칫하고 방향을 돌려서 나
이렇게 말하는데 스스로 너무 상황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고 예민한 것은 되려 나였구나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그냥 하는 행동일 수도 있다. 그래서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행동은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단호하게 말을 했다.
뭐라고 할까? 사랑이는 아직 타협점이 없는 그런 상태로 극과 극의 반응 선택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친구들 사이 관계에서도 심할 정도록 종속적인 형태로 변질된 것 같았다.
첫째는 막내 사랑이의 그런 교우관계를 알고 있어서 그런지 걱정스러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친구랑 놀려면 친구에게 맞추어줘야 안 그러면 난 친구가 없어. 근데 애초에 맞출 친구가 없어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줄까 생각에 잠겨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현실.
애초에 친구가 없는데 그런 시나리오가 성립이 안된다.
한바탕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맞아~ 친구가 애초에 없는 사랑이한테 내가 말하는 해결방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
아니 알면서 왜 그런 비정상적인 관계로 친구에게 그러는 건데? 의문이었다.
착한 아이가 안되면 친구들이 관심을 안 가져주니깐.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 그렇게 안 하면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을 테니깐.
친구가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면 다 해줘야 해. 스트레스받지만 그렇게 안 하면
난 정말 쓸모가 없는 것 같으니깐. 누구라도 날 필요로 해주고 관심을 받고 싶으니깐.
아니 가족들이 있잖아? 사랑하는 거 몰라?
알지만 난 사랑의 양도 중요해!
사랑의 양?
어릴 때부터 늦둥이 막내로 온갖 사랑과 관심을 받았지만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감소하게 되는
관심은 사람이 아닌 사물 혹은 상상의 창작에 가까워졌다.
안타깝게도 그 시기에 아빠가 없어지고 엄마는 바쁘고 언니와 오빠도
학교 생활로 바쁘면서 사랑이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격차가 갑자기 너무 커서 적응할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3년이나 방치되었다가 자신이 선택한 생존방법을 질타하듯이 이제야 관심을 가져준다고
생각한 사랑이 입장에서는 야속하게 생각할만하다.
그러고 보면 사랑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기쁨보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숙제였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르고 그저 그림 그리기라도 취미를 갖게 되어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었다.
참으로 자기 편리한 대로만 해석하고 결론짓는 꼰대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림에 담긴 것은 사랑이의 고뇌였는데 어리다는 이유로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그저 그림 잘 그리네~ 하는 칭찬만 하고 말았다.
감정 표출의 해방구를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 투쟁기 같아서 이제는 그림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친구한테 맞추지 마 그런 식으로 친구 사귀는 거 아니야. 이렇게 말을 했지만 사랑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그런데 사실 난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 다가오는 친구들도 밀어냈어
친구는 마음을 나누고 어쩌고 이런 교과서적인 말이 친구가 없는 아이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실 친구와 관계를 제대로 쌓아본 적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실 내가 어릴 적에 친구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던 터라. 설명해 주기 힘들었다.
사회적인 관계에서는 눈치껏 그런 자리와 상황에서 큰 문제는 없었지만
친구와 무엇을 공유하거나 같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일하면서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라고 다른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취미도 관심사도 그렇게 없었다.
일하면서 작업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그 밖에 사회적 교류를 하기보다는 가족에게 몰두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어쩌면 아이들이 사회적인 관계 형성의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 가장 큰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가족 단위에 이벤트만 있다가 갑자기 아빠는 떠나고 나머지 가족들은 각자 바쁜 삶으로
교류가 중단되니 사랑이 입장에서는 정말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투병 생활이 5년 넘게 지나다 보니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어지다 보니 취미활동 같은 것을 지원해 줄 여력도
없었던 것이 아쉽다.
그렇게 사랑이가 찾은 생존전략은 바로
무조건 친구들에게 맞추는 말과 행동이었다.
건강하지 못한 그런 관계를 어떻게 개선해줘야 할지 사실 말로 설명한다고 그게 이해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상담을 받아보게 한 적도 있지만 상담선생님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사랑이는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도 필요하다. 말씀을 하셨지만 부모 입장에서 친구에게 맞추기만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가 같이 놀아주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무척 아팠다.
자존감 높고 당당하던 사랑이는 사라지고 어느새 낯선 모습의 사랑이를 마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소화하기 어려운 모습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국은 사랑이에게 관심과 사랑의 양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성장통을
이해하고 받아 드리게 도와줘야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보이는 것만으로 그저 행복하고 괜찮아진다고 착각하면 속에서 아파서 망가지는 것을 발견 못하는
큰 잘못을 하게 될 수 있다.
스스로 사춘기라면서 자기도 답을 찾고 싶다고 외치는 사랑이에게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다. 사랑을 어떻게 포기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