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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 Jan 05. 2021

네가 누나니까

나는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리고 내 아버지는 4남 1녀 중 첫째 아들이었다. 내 하나뿐인 남동생 동민이, 둘째 작은아버지네 하란이, 동규, 셋째 아버지네 동환이, 넷째 작은 아버지네 예담이, 예진이, 그리고 막내 고모네 민우, 민성이, 줄줄이 8명이 다 내 동생들이었다. 

나와 한 살 터울인 내 동생과 둘째 작은아버지 네 큰딸 하란이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고, 셋이 놀 때가 가장 즐거웠다. 우리 집은 제사를 자주 지내서 서울에 있는 친할머니 댁에 갈 일이 많았었는데, 할머니가 자기 전에 이불 하나만 깔아 줘도 그 안에서 깔깔거리며 놀았던 기억이 행복하게 남아 있다. 

매해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새로운 식구들이 생겼고 한 명 한 명 동생들이 늘어 갔다. 큰 며느리인 엄마와 작은 어머니들은 모이기만 하면 제사 음식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어린 동생들을 돌봐 줘야 하는 일은 늘 내 몫이었다. 

사방팔방 뛰어다녀야 하는 어린 사촌동생들의 기운을 빼놓기 위해서는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야 했다. 그들의 에너지를 잔뜩 빼 준 후에, 가까운 슈퍼에 가서 작은 어머니가 쥐어준 돈으로 과자를 사 오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놀이터에서 슈퍼까지는 길을 한번 건너가야 했는데 그 나이 또래에게는 위험한 길이었기 때문에 항상 엄마는 애들 잃어버리지 말라고 손 꼭 붙잡고 다니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나는 내 동생 손을, 내 동생은 또 그보다 어린 사촌 동생들의 손을 꼭 잡고 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 아빠는 나와 내 동생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하청 공장을 하셨었다. 어느 날은 곤하게 자고 있는 나와 동생을 집에 두고 출근을 하셨었나 보다. 먼저 일어난 나는 자고 있는 동생과 둘이 남겨진 걸 알고 한참 엄마를 찾았다. 집에 엄마가 없다는 걸 알고 엄마를 찾으려 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나는 무슨 재주인지 집에 있던 가벼운 플라스틱 의자를 끌고 와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갔고,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갔던 기억을 따라 공장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그때는 내 옷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서,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아빠의 잠바를 내복 위에 대충 걸쳐 입었다. 그 꼴로 시장 길을 지나가는데 경찰 아저씨 두 분이 내게 다가와 “ 꼬마야 네 엄마 어디 있니?”라며 물었다. 나는 엄마 있는 곳에 간다고  당돌하게 쏘아붙이고는 내 갈 길을 갔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찌 그 어린 나이에 그랬나 싶다. 어찌어찌 엄마 아빠가 있는 공장에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다음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집에 동생을 두고 왔다고 혼이 났던 것 같다. 나는 그냥 엄마가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네가 누나니까, 동생을 잘 돌봐야지,”

라는 말을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 말은 어린 나에게 큰 부담이었고, 어리광을 피울 수 없게 했다. 초등학교에 가기 전부터 나는 누군가를 돌보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살아오면서 엄마에게 내가 무엇을 갖고 싶다거나 바라는 것을 솔직하게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인간관계에서도 무언가를 받기보다 해 주는 것이 편하고, 받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주변 사람들 중에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어려웠다. 처음에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님에게 혹은 타인에게 자기의 감정과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친구들을 보면 참 부럽다. 

그런 나도 어릴 적 엄마가 꼭 해줬으면 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방과 후에 예고에 없던 비가 오면, 교문 앞에 우산을 쓴 엄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아이들을 기다리곤 했다. 자기 엄마를 보고 쪼르르 뛰어가는 친구들, 차를 끌고 운동장까지 들어오는 부모님의 차를 타고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우리 엄마도 왔을까?”

항상 기대했었지만, 맞벌이를 하셨던 부모님은 그 기대를 채워주진 못하셨다.
나는 실내화를 갈아 신고, 신발주머니를 머리에 쓰고 입을 앙 다문 채로 학교 앞 문방구, 떡볶이집, 동네 슈퍼, 세탁소 처마 밑에서 몸을 쉬어가며 그렇게 집으로 달려갔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10분도 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때의 기억이 슬로비디오처럼 남아있는 걸 보면, 아마도 그때 나는 참 외로웠나 보다.

그렇다고 나는 그때의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내 부모님도 그들의 부모에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세대였기 때문에, 먹고사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세대였기 때문에,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아직도 엄마는 내가 아빠 잠바를 입고 공장에 찾아갔던 이야기 하시곤 한다. 그 일이 있은 후에는 나와 동생을 꼭 공장에 같이 데려가셨다고 했다. 엄마도 많이 놀라셨었겠지. 

그냥 지금은 그때의 나에게 돌아가 얘기해 주고 싶다.

“너도 그때는 누군가 돌봐 주길 원했을 텐데,  참 많이 외로웠겠구나,
 잘 버텨주어 고맙다, 그리고 너 참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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