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 후 마음껏 울 수 있는 시간은
병원에서 망자를 배웅할 때,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이할 때, 장례를 치를 때, 제 머릿속엔 계속 물음표가 떠올랐어요. ‘이게 맞아?’ 고인을 떠나보내는 일에서 유족들이 배제되고 슬퍼할 시간을 빼앗기고 마지막 온기가 남은 시신에 머무르고 싶은 간곡함을 무시당하는 일, 그게 이 시대의 장례일까요?
누구를 위한 장례식일까[장례유감]은 그래서 쓰게 됐습니다. 이 쓰리고 불쾌한 기억을 하나씩 들여다 보고 짚어가는 일이 제게는 치유과정이, 언젠가 상실을 겪게 될 독자님들께는 하나의 예습서가 되었으면 합니다. 한 번에 털어내기엔 버거워 몇 번으로 나눠 풀어내 보겠습니다.
삶은 우리가 타인과 아름답고 복잡하면서도 엉망으로 읽히고,
타인에게 우리의 곁을 내주면서 만들어진 거미줄과 같다.
그렇다면 죽어가는 과정 역시
우리가 만들어낸 삶의 거미줄 속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만들고 또 우리를 만든 삶의 연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 ‘길들여지지 않는 슬픔에 대하여’ 중
허무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에서 유족은 아무렇지 않게 배제됐다.
“숨을 안 쉬신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아버지가 가장 먼저 오열하셨다. 아직 뇌의 어느 부분이 깨어있을지 모르는 할머니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여주기 위해 나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았다. “우리는 나중에 힘들어해도 되잖아.”라던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소멸해가는 모습을 지켜봐주고, 삶이 다하는 순간 죽음의 주인공이 느낄 두려움을 덜어주는 것,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 안겨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해드리는 것. 할머니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감지한 뒤 내가 골몰한 일들이다.
산소포화도 수치가 떨어지고 삐- 하는 기계음이 점차 시끄럽게 울려올 때 나는 목뒤를 팔로 받친 채 할머니를 끌어 안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왼편을 지켰고, 아버지는 할머니의 오른편에서 손을 잡고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 계셨다. 내 뒤로 간병인이 서있었고, 엄마는 내 옆 어딘가에 계셨던 것 같다. 아마도 오전 11시25분쯤. 얼마간 아직 온기가 느껴지는 할머니를 다독이며 속삭였다.
“할머니, 정말 멋진 삶을 사셨습니다. 나는 할머니처럼 사는 게 꿈이에요. 우리 천국에서 만나요, 할머니.”
뒤에 서서 임종을 지켜보던 간병인 여사님이 눈물을 훔치며 “이제 할머님을 눕혀드려야겠어요.”라고 하셨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내 할머니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내가 목을 끌어안고 있던 탓에 심장보다 높게 든 상체에서 급격하게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간병인 여사님의 말대로 할머니를 눕혀드리자 얼굴에 다시 핏기가 돌았다.
회진시간이 되었지만 담당교수는 오지 않았다. 사망선고를 위해 부른 의사는 할머니의 양쪽 눈을 벌려 동공을 확인하더니 “11시 31분 사망하셨습니다.”하고 말했다. 그제서야 나는 울음을 토해내며 통곡했다.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 뒤 이제 유족들이 감정을 터뜨리려는 찰나, 딱 그 때부터 유족들은 배제되기 시작했다. 간호사들이 줄줄이 들어오더니 콧줄을 빼야하는데 그걸 보는 게 힘들 수 있으니 나가있으라고 권유했다. 불과 몇 분만에 할머니를 낯선 이들의 손에 맡기고 곁을 떠나는 게 내키지 않아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서있으니, 이들은 아예 “좀 나가달라”고 했다.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 들었다. 아직 다 울지도 못했는데 애통의 시간을 방해받는 기분이 들었다. 마지 못해 1인실 문을 나서는데 동생이 보였고, 품에 안겨 다시 흐느꼈다.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병실 문을 나서며 할머니와 떨어진 이후 나는 할머니를 보지 못했다. 할머니는 곧바로 영안실로 옮겨졌고 입관식에서 잠시 얼굴을 어루만질 수 있을 뿐이었다. 사귀던 연인과 작별인사를 나누더라도 이보다 헤어짐의 시간이 길 텐데, 하물며 평생을 함께 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일에서 이토록 강제로 생이별을 겪어야 하는 게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다. 내친구는 집에서 아버지를 임종한 뒤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고는 깜짝 놀라 가족들과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고 했다. 서서히 헤어지면서 상실을 수용하는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 말이 그제서야 아주 깊이 이해가 되었다.
이 때였다. 내 안을 채운 감정이 슬픔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슬픔, 망연자실, 허탈함, 상실감, 분노, 원망, 불쾌함, 자책, 황당함 등.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뭉치들이 불판 위 팝콘처럼 마구 솟아올랐다. 무엇보다 시신을 억지로 양도하는 순간부터 남은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기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궁금했다. 유독 한국의 장례절차만 유족들에게 이렇게 무례한 걸까? 이게 맞아?
탐색했다. 당장 손을 뻗으면, 아니 손가락만 펴면 닿을 수 있는 유튜브에서 비슷한 경험을 찾고, 도서관 서재에서 죽음이나 임종과 관련된 책들을 뒤졌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첫 번째 책이 바로 미국 장의사가 쓴 ≪길들여지지 않는 슬픔에 대하여≫다. 장례절차가 상업화되어가는 미국에서도 저자인 장의사는 일찍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포착하고 있었다.
장의사들은 망자의 시신을 가져다가 염을 하고, 옷을 입히고, 관에 넣고, ‘짠’하고 마법처럼 사라지게 만든다. 부패가 되지 않도록 방부 처리를 해서 흠이 가지 않게 만들어 잠자는 듯한 시신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화장을 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시신을 가져가서 작은 상자로 바꿔주는 과정에 가족은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 현대적이면서도 죽음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악화시키는 일종의 마법인 셈이다. 죽음 근처에 접근하지 않으면서 망자를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쉽게 잊히고 무시되며, 매우 단출한 논리이다.(95쪽)
죽어가고 있거나 죽은 사람을 친절한 양로원 산업이나 죽음을 마치 예정일이 지난 임산부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병원 시스템, 기쁜 마음으로 망자를 대신 처리해주는 장례 산업에 맡기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윈윈’이라고 판단한다. 한마디로 대신 죽음에 대응할 누군가를 고용하고 상당한 돈을 지불한다. 죽음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은 미국인들의 영혼 속에 섞여 있다. 그래서 다양한 전문 집단을 만들어서 모든 과정을 대신 처리하도록 해버렸다.(94쪽)
수없이 유족들을 만났을 저자는 말한다. “망자에게 가까이 갈수록, 죽음을 더 쉽게 수용한다”고. 그리고 이토록 죽음을 산업화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증언한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죽음과 아주 가까웠다. 현대에는 죽음과 관련된 부정적인 인식이 너무 강해서 초월하기가 어렵다.”
이런 문화에 저항하는 의식있는 가족들도 있는데, 나는 그들을 보며 ‘왜 저렇게 하지 못했을까’하고 무력감을 느꼈다. 하나의 본보기가 토미의 가족들이다. 장례 절차의 청중이 되는 데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했을 때, 그 지인들이 직접 시신을 꾸며주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죽음의 가장 대표적인 예였다. 우리 가족은 입관 때 할머니의 품에 생전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꽃을 안겨 드렸지만 화장을 하거나 염을 하는 건 모두 장례지도사의 몫이었다. 어설프더라도 전문가의 옆에서 시신을 눈으로 보고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음을 인식하면 수용할 수 있으련만 그 시간은 기한을 알 수 없는 때로 유예됐다. 토미의 가족이 경험했듯 장례지도사가 유족에게 장례의식에 참여할지 묻는 건 우리나라 장례 산업 현실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내가 격하게 끄덕인 대목은 또 있다. 유족들을 ‘죽음과 관련된 아마추어’로 만들어버린 장례의 산업화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상실을 마주하는 과정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다. 그동안 직계 상을 당한 적이 없어 그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는 게 황당했다. 12년 전 큰고모부, 몇 해 전 막내 고모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나는 장례에서 유족들이 배제되는 경험을 했다. 하지만 내가 직계가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친척들이 모두 돈독한 까닭에 나는 큰고모부와 막내고모를 떠나보내고 오랫동안 힘들어했다. 그러나 장례절차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내 친척들의 깊은 애착과 강한 연대를 짐작할 수 없기에 표준화된 절차에서 내가 배제된 것이겠거니, 여겼다. 지금와서 생각해보건대 편의에 의해 정형화 되어버린 절차가 직계상을 당한 유족들에게만 특별히 친절할 리 없다.
죽음이 부정적인 문화로 형성되고, 계속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에는 장례 산업이 ‘가족들은 망자를 감당할 능력이 없어요. 죽음은 무섭고, 복잡하고, 메슥거리고, 슬픈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대신 해드립니다.’라고 인식시키기 때문이다.(93쪽)
장례 ‘산업’은 관련된 일을 전문화시키고, ‘동네 장의사’의 개념을 없애버렸다. 그러면서 암묵적으로 또 법적으로 모두를 ‘죽음과 관련된 아마추어’로 만들어버렸다. 의사가 죽음을 선고할 권한이 있는 것처럼 장의사는 죽음에 관한 권한을 얻어냈다. 그렇게 죽음에 서툰 사람들, 즉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있어 경험과 노하우가 부족한 사람들에 관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장례 산업은 ‘죽음의 전문가’를 만들어내는 데서 일부 책임이 있다.
병원에서 숨을 거두신 뒤의 절차에 대하여는 다시 다루겠지만, 조문객들이 지켜야 할 예의도 10여년 전 찾은 동료의 부친상 빈소에서 경험한 것보다 옅어졌다고 느꼈다. 할머니께서 10년 가까이 머문 요양원의 관계자들은 조문와서까지 경솔했다. “워낙 건강하셔서 돌아오실 줄 알았거든요.”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으련만, 헛소리를 지껄이는 바람에 내 혈압이 오르고 말았다. “아흔다섯해면 그래도 장수하셨잖아요.” 히히덕거리며 습관적 웃음을 덧붙였다. 사람이 눈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의 귀가 찢어질 듯이 노려봤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엉망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굳은 다짐이 그들을 살렸다.
(요양원에서 할머니를 살뜰히 챙겨주시던 요양보호사님들에겐 늘 감사한 마음이다. 그분들은 인자하신 할머니를 무척 좋아하셨고 할머니와 찍은 영상이나 통화녹음에도 곧잘 등장하신다. 그러나 이 요양원에 처음 모실 때 있던 이사장과 원장은 요양원을 팔고 떠났고 이후 온 후임자들에게선 따뜻함 대신 자본주의 미소만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여자는 며느리인 엄마를 끌어안으며 “축하해”라고 말했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몇 초 뒤 나의 뇌가 “네가 들은 것 맞아”라고 확인해준 건 그 여자가 같은 말을 한 번 더 하며 엄마의 등을 토닥일 때였다. 나는 살인충동에 가까운 걸 느꼈다. 자신이 시어머니를 증오했다고 우리 엄마까지 증오했을 거라 착각할 만큼 모자란 인간이었다. 엄마 옆에 나란히 서서 펑펑 울고 있는 손녀의 귓가에 정확히 꽂히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헤아릴 줄 모르는 무분별한 인간이었다. 그 여자는 장례식에 오지 않는 편이 좋았다.
일평생 교회에서 새 가족을 맞이하는 태도로 조문을 받은 우리 가족의 모습에서도 피로를 넘어 염증을 느꼈다. 우리는 고인을 추모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한참을 떠났다가 오랜만에 얼굴을 본 이들을 조문객이 아닌 교인으로 맞이했다. 그 장소가 장례식장임을 잊은 듯한 풍경이 기괴했다. 빈소가 꼭 침통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순간 가장 위로받아야 할 사람을 위로하고 그 아픈 마음에 방해가 되지 않는 최소한의 배려, 존중이 그 곳에 부족했던 것이다. 실의에 잠긴 마음 만큼 충분히 애통해하지 못한 우리는 장례가 끝난 뒤 그 후유증, 감정의 후폭풍을 오롯이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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