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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의 나무 Feb 09. 2024

Ep.4 쏠트커피와 종이학 스무 마리

할머니의 장난, 손녀의 거짓부렁

안녕하세요. 오늘도 제 슬픔의 기록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님은 이번 명절 어떻게 보내시나요? 저는 할머니가 안 계신 명절을 맞이하기는 처음이라 아직 명절모드로 전환을 못하고 있어요. 여느 휴일처럼 늦잠을 자고 일어나 느릿느릿 아점을 먹고 어질러진 집을 조금 치우고 커피 한 잔을 끓여 키보드에 손을 올렸어요.
참 이상하죠. 흐트러진 마음상태를 보여주듯 아직도 집은 엉망인데, 할머니와 추억을 떠올리느라 얼굴에 웃음이 번지면 뭐라도 할 힘이 생겨요. 이 곳에 애도일기를 쓰는 원동력은 할머니를 향한 사랑이구나 다시금 실감해요.
“넌 아직도 1월이구나.”
지난주 앓아누운 딸집에 들른 어머니께서 달력을 넘기며 말씀하셨어요. 지금까지 삶의 어떤 고난도 씩씩하게 헤쳐나갈 수 있었던 건 신앙의 스승인 내 사랑 할머니께서 곁에서 응원해주신 덕분인데, 이번 상실은 인생을 지탱해준 그 커다란 버팀목 없이 홀로 견뎌야 하는 까닭에 치유에 필요한 시간이 유독 긴 것 같아요. 이번 명절은 다른 일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추모에 집중하려구요.
오늘은 음력 세밑이에요. 여러분도 묵은 감정, 슬픔, 상처, 기억, 모두 오늘 정리하시고 내일 새 해가 뜰 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의지를 다져보시기를 바라요.



이것 좀 마셔봐


“나 커피 마셨어.”

“아이, 한번 마셔보라니까?”


커피 한 스푼, 프림 두 스푼, 그리고 설탕 두 스푼 반. 달달한 할머니표 다방커피를 마시면 스르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음미하게 된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잔을 건네받고 후루룩, 한 모금 삼킨 나는 이내 눈살을 찌푸리고는 할머니를 흘겨봤다.


꺼이꺼이, 웃으시는 할머니는 설탕통을 연다는 게 그만 소금통과 착각을 하셨다며 배꼽이 빠져라 웃으셨다. 내 반응이 즐거운지, 들숨에 한 박자 쉰 할머니의 웃음은 두 번째 마디를 채우며 리듬감 있게 울려 퍼졌다.


“얼른 버려. 내가 새로 타줄게.”

“아니여, 버리긴 왜 버려. 설탕을 더 넣으면 되지!”




내 평생을 함께 해준 내 단짝 친구

커피 한 스푼, 프림 두 스푼, 그리고 설탕 두 스푼 반. 달달한 할머니표 다방커피가 그립다.게티이미지뱅크



할머니는 큰 머그잔을 꺼내 소금커피를 부은 뒤 거기에 커피 한 스푼, 프림 한 스푼, 설탕 세 스푼을 더 풀어 주전자에서 팔팔 끓은 물을 붓고 휘휘 저으신다. 부엌창을 내다보며 한 모금 입에 머금은 할머니는,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소금 커피를 다시 권하셨다.


“와, 이것 좀 먹어봐라!”

“할머니도 참!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줄 알고? 흥.”

“진짜로 맛있다니까? 두 번 속는 셈 치고 마셔봐 얼른.”


할머니의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나는 머그잔을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미각에 반응하는 내 진실의 미간에 미리부터 힘을 주고는 반모금 빨아들였다. 미간이 펴지며 눈썹이 치솟았다.


“오잉? 진짜 맛있네!”

“내가 그랬잖아. 맛있다니까.”

“오묘한 맛이 나. 짠맛 때문에 더 달짝지근하고, 왠지 커피 향도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고.”


알고 보면 쏠트커피의 창시자인 우리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시절 쏠트커피를 발견한 우리집 바리스타셨다. 커피마니아인 할머니와 손녀에게는 꽤 획기적인 사건이었는데, 손녀는 쏠트커피의 묘미를 즐기기도 전 걱정보따리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할머니가 혹시 지남력장애(치매)면 어쩌지...’


하얀 가루가 담긴 소금병과 설탕병을 헷갈리는 건 흔한 일인데, 어린 나는 괜스레 할머니의 총기가 흐려질까 걱정되었다. 걱정 풍선을 머리에 띄운 채 하굣길 버스를 타다가 뒷자리 학생에게 시선이 멈췄다. 품에는 종이학이 가득 담긴 유리병을 안고 있었다. ‘그래, 이거야!’ 버스에서 내린 나는 한 달음에 아파트 단지 앞 문구점으로 갔다. 100장짜리 학종이를 사들고 집으로 들어선 나는 무슨 핑계가 좋을까 고민하다, 할머니가 꼼짝 못 할 이유를 찾아내 둘러댔다.





손녀의 애정 어린 술수에 속아주신 할머니

종이학 접는 법을 일흔 살 할머니께 전수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할머니가 흥미를 느끼는 날이 적었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할머니, 나 학교에서 숙제가 있어!”


방학숙제인데 미리부터 해두어야 나중에 힘들지 않다고 거짓부렁을 보태가며 할머니를 설득했다. 손녀딸의 학교 성적과 관련된 일이라면 신사임당 안 부러울 정도로 열 일 제쳐두고 나서시던 우리 할머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의욕은 충만했지만, 일흔 해를 사신 할머니의 손으로는 조그마한 종이의 모서리를 겹쳐 똑바로 맞추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를 앞에 앉혀두고 학의 날개를 가다듬는 법까지 차근차근 알려드렸다. 등을 부풀리는 클라이맥스는 3주 뒤에나 진도가 닿을까 말까 해 보였다.


한 달 동안 손녀의 학 접기 강좌를 수강한 할머니는 이제 더듬더듬 학을 접을 수 있게 되셨다. 학의 양 날개가 되어야 할 부분을 교차시키지 않아 머리와 꼬리가 날개 자리에 기운 없이 펼쳐져 있기도 했지만, 전체 과정을 암기하셨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하루는 중간고사 기간 독서실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자정이 넘어 귀가해보니 할머니가 그때까지 방 한 켠 TV 앞에 웅크리고 앉아 학을 접고 계셨다. 대학교 때까지 할머니와 한 방을 썼기에, 할머니의 일상은 손녀의 시간표에 맞춰 돌아갔다. 목과 허리, 어깨까지 욱신욱신하다고 투정을 부리던 할머니는, 이제 눈까지 침침하다며 결국 폭발하셨다.


“나 이제 안 해. 너 이거 숙제 아니지.”


그 뒤로도 손녀의 걱정 어린 술수(?)에 잠자코 속아주셨던 할머니는 매번 못 이기는 척 손녀의 요구를 따라주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다. 마음이 놓였다. 두 달간 학 접기 강좌를 따라온 할머니는 치매일 리가 없었다. 스무 마리쯤 되었을까. 할머니가 접은 스무 마리 학은 토끼모양 유리병에 담겨 수년간 내 방에 온기를 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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