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완벽할 수도, 세팅할 수도 없다. 준비할 수 있을 뿐이다.
자의식 과잉 아니야?
수화기 너머로 찬바람이 쌩하고 불었다. 최근 상실을 겪은 친구와 마음을 나누고 싶어 어렵사리 건 전화였다. 나는 요즘 자조모임(自助모임, 비슷한 경험을 나누는 모임)에 나가는 대신 평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들에게 할머니와의 추억,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보낸 뒤 여전히 소용돌이치고 있는 마음을 공유하고 있다. 일종의 홈그라운드 자조모임이다. 아직 해갈은 먼 상태.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한 달 만에 처음 현충원에 다녀온 날이라 더욱 헛헛했다.
꼭 마음 품앗이를 기대한 건 아니다. 그래도 내 마음이 어떤지 가만히 들어줄 거라 기대했던 나는, 뜻밖의 반응에 그만 고장나버렸다.
1초,
2초,
3초.
생각의 회로를 어느 쪽으로 틀어야 하나.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망설이다 잠시 뒤 깨달았다. 종종 인공지능(AI)으로 바뀌는 그의 습성을. 침묵이 이어지자 AI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무 차갑게 말했나?”
그의 진단은 이렇다. 나의 애도의 기간은 너무 길고, 그건 내가 슬픔에 자꾸만 먹이를 주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제는 충격요법이 필요하다. 이제 그만 무기력모드에서 빠져나와 운동이나 즐거운 활동을 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일상을 회복해야 한다.
나는 안다. AI는 할머니의 마지막을 좀 더 일찍 편안하게 만들어 드리지 못해 속상해하는 내 죄책감을 덜어주고 싶었음을. 나보다 몇 달쯤 먼저 상실을 겪고 슬픔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AI가 진단하기에 내겐 지금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그게 가장 적절한 위로라고 여겨 한 말일 거라고 나는 이해했다.
방어태세로 전환했다면 이렇게 받아쳤을지 모른다.
“아니, 너 역시 자의식 과잉 아니야? 슬픔이 개인적인 경험인 만큼 애도의 기간도 다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있잖아. 슬픈 마음이 내 마음대로 달래지면 얼마나 좋겠어.”
그러나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뒷말도 궁금했다. 그건 잘한 선택이었다.
펀치부터 날린 그는 ‘자의식 과잉’ 뒤에 숨은 뜻을 덤덤하게 설명했다.
제아무리 소문난 효자 손녀라도 구급차가 처음 환자를 이송할 병원은 선택할 수 없고(원하는 병원으로 모시려면 사설구급차를 불러야 한다), 환자가 한 번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병원을 옮기는 건 쉽지 않으며, 잠시 수치가 좋아진 그날 밤이 할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밤이 될 거라는 걸 지금 와서야 아는 것이지, 인간인 네가 당시로선 알 수 없던 게 당연하다고.
“죽음의 주연은 네가 아니야. 삶을 마무리하는 당사자, 그러니까 고인이야. 너는 그저 조연일 뿐이야. 그런데 네가 할머니를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마지막 순간을 완벽하게 만들어드리지 못했다고 속상해하는 건 조연 주제에 순리를 거슬러보겠다는 오만일 수 있다는 거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순간의 진리는 무엇일까’를 자주 떠올린다는 그는 죽음과 인간의 한계에 적용되는 진리를 명확하게 짚었다. 종교가 없는 데도 가끔씩 내 신앙에 이런 자극을 주곤 한다. AI다운 냉철한 위로였다.
그랬다. 그 밤이 마지막밤이 될 줄 나는 몰랐다. 새로 지은 대학병원으로 어렵사리 전원해드린 뒤 할머니의 숨소리는 안정적이었고 교수님도 “하루쯤 더 버티실 것 같다”라고 했다. 이미 나흘째 할머니 곁을 지켰으니 마지막 길을 배웅해 드리고 작별의 순간을 오롯이 눈과 머리와 가슴에 담으려면 체력을 비축해 두는 게 좋겠다, 잠시 눈을 붙이고 씻고 옷도 갈아입고 와서 마지막 날에 종일 함께 있어드리자, 그게 내 심산이었다.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는지, AI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의 죽음도 완벽할 수는 없을 거야. 아쉬운 대목이 남아있는 채로 죽음을 맞게 되겠지. 세상에 완벽한 죽음이 어디 있겠어. 그러니까 죄책감은 좀 내려놔도 되지 않을까.”
“서른 해 넘게 넘치는 사랑을 받은 건 축복 아니냐? 난 네가 부럽다.”는 애정 어린 질투에 공감한다. 안다. 당장은 눈물로 가득한 이별의 슬픔은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면 축복의 결과물인 것이다.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볼 때 다소 긴 나의 애도의 시간은 할머니와 사랑을 나누며 함께 보낸 세월만큼 아직도 진하게 우러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슬픔의 잔은 사랑의 티백에서 우러난 셈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홀로 섬 위에 있다. 이 이중의 고통은 인간이 겪는 다른 어떤 상처보다 슬픔에서 더 도드라지는 것 같다. 연인이든 친구든 지인이든, 심지어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하는 직장동료든, 슬픔에 잠긴 이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 역시 소외감을 느낀다. 이 소외감과 대면하자. 슬픔에 관해서라면 우리들 대부분이 서툴고 어색하다고 느낄 테니 말이다.
- 슬픔의 위안(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 중 -
진심을 눌러 담은 한마디 말부터 고이 간직해 온 상실의 경험을 털어놓는 일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마음을 달래주려 건네는 모든 위로는 애정으로 기억된다. 다만 상대방이 애도의 궤적, 그 어디쯤을 밟고 있는지 위로자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슬픔의 깊이는 사랑이 쌓인 두께에 비례한다. 누군가를 잃고도 빈자리가 허전하지 않다면 그건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애도의 과정 중 초기 단계엔 그 어떤 위로도 애곡하는 이의 마음에 닿기 어렵다. 옆사람으로서는 그 두께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침묵을 택하는 건 이 때문이다.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가 《슬픔의 위안》에 기술했듯, 위로가 필요한 사람과 위로자, 양쪽 모두 어찌할 바를 몰라 각자의 소외감을 느낀다. 이때 탁월한 위로자는 슬픔을 꺼내놓지 못하고 군중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이의 ‘침묵에 다리를 놔준다’. 그가 말하게 해주는 것이다.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토해낼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이다. 비탄에 잠긴 이가 혼자라고 느끼지 않도록 곁을 내어주는 것이다.
(떠오르는 대로 적어 본)
1. 어설픈 위로는 독이 돼요.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마음은 아물 때까지 시간이 필요해요.
“사람도 만나고 활동도 하라”고 쉽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저 등을 토닥여주고 밥을 챙겨주고 안부를 물어주세요.
2. ‘뭘 그리 유난이냐’는 눈초리는 상처를 덧나게 해요.
개인의 경험만큼 각자 느끼는 고통이 다를 수 있어요. 애도의 기간도요. 비탄에 잠긴 이에게 “그만하면 됐잖아” 핀잔을 주는 대신 ‘저 사람에겐 아직 우려낼 슬픔이 남아있구나’ 여겨주세요.
3. 모른 체 한 게 아니에요.
비통한 마음에는 아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요. 분명 말했는데 잊어버리고, 얼굴을 봐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어요. 저장이 안 되거든요. 조금만 너그럽게 봐주세요.
4. 함께 있어주세요. 그리고 들어주세요.
억지로 즐거운 기분을 느끼게 해주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금은 감정이 메말라서 그래요. 불쑥 솟구치는 눈물 탓에 힘들거든요. 그 감정을 차분히 마주할 수 있게 가만히 기다려주세요.
5. 감정조절장애는 일시적이에요.
롤러코스터를 타는 분노와 슬픔, 원망, 죄책감으로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워요. 당신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에요. 상실로 인해 힘들어하는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조금씩 나아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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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제 슬픔의 기록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른 아침에 찻물을 끓이기로 했는데 앞선 두 번의 발행이 늦어져서 마음이 안 좋았어요. 양해 부탁드려요. 실은 심하게 앓았거든요. 어제는 퇴근길 매일 타는 전철을 거꾸로 타고 한참을 가다 뒤늦게 깨달았네요. 아직도 많이 힘든가 봐요. 그래도 다시 힘내서 글을 써보겠습니다!
2화에서 예고해 드린 대로 식탁에 쌓아둔 ‘슬픔큐레이션’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 읽으며 든 생각들, 마음 치유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차차 ‘슬픔의 향’으로 전해드리려고 해요. 작은 고민은, 저자들의 사유와 통찰이 너무도 적확하고 위로가 되어서 책을 계속 사게 된다는 거예요. 이사하면서 더는 책을 사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그 결심이 무색해져 가요. 그만큼 내용이 좋아서 빨리 공유해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