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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의 나무 Feb 05. 2024

Ep.2 ‘죽음의 안식일’이 주는 교훈

남은 이들을 위한 건강한 애도



모두가 ‘죽음’이란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다.
끝을 안다고 해서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 길들여지지 않는 슬픔에 대하여(칼렙 와일드) 중  -



비상등을 켰다. 갓길에 차를 세웠다. 와이퍼가 연신 빗물을 닦아내는데도 앞이 뿌옇게 보였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옆자리는 할머니 전용석. 강여사님이 좋아하는 엉뜨를 켜두고 목베개와 담요도 준비해 뒀다. 뒷좌석엔 언제든 꺼내드릴 쌀과자와 양갱이 놓여있다. 트렁크는 깔끔하게 정리해 뒀다. 언제든 할머니 휠체어를 실을 수 있도록.


그런데 그 옆자리가 비어있다. 주인을 잃은 간식은 쓸쓸하다. 내비게이션은 그동안의 빅데이터를 토대로 휴먼에게 요양원으로 향하는 길안내를 제안한다. 그러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할머니께 갈 때는 이른 점심 무렵인데 지금은 새벽과 아침 사이. 뻥 뚫린 듯 공허하고 슬픈 이 마음을 털어놓으러 교회로 향하는 길이다.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장례 이후 슬픔을 마주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점차 확신이 되어 간다. 내면에 귀를 기울일수록 고갈된 나의 상태를 본다.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회복할 수 없다.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버겁다. TV는 소음일 뿐이다.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 찾은 건 예배와 책.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천국소망에 의지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의 슬픔을 담은 책에 몰두한다. 비슷한 감정을 적은 대목을 만나면 반가움을 넘어 위로를 얻는다.




사별 후 ‘여백’이 필요한 이유


서울도서관을 둘러보다 한참을 머문 곳. 죽음학, 죽음 카탈로그, 죽음준비, 임종의학 등 삶의 끝자락을 다룬 책들로 빼곡하다. ⓒ티나의나무



그러다 미국의 장의사가 쓴 책을 만났다. 업(業)으로 죽음을 다루는 장의사 가족에게도 가족을 떠나보내는 일은 마음 복잡하고 마음뿐 아니라 몸도 아픈 일이라고 한다. 할머니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나는 이 사건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내 평생에 걸쳐 가장 사랑해 온 한 사람의 소멸과 부재는 마치 내 삶에서 ‘생명이 빨려나가는 듯’하다. 할머니와 피 한 방울 안 섞인 며느리, 그러니까 내 엄마 역시 아직도 힘들어하신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자신도 모르게 할머니 옷을 고르고 있더라고 하셨다. 슬픔이 허전함으로 바뀌었을 뿐 그 빈자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하신다.


장의사로 대를 이은 칼렙 와일드는 할아버지를 보내며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적었다. “애도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피부로 느낀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생명이 빨려나가는 것 같다”라고 말이다.


우리 가족의 버팀목이셨던 할머니의 죽음은 서로 씨줄과 날줄로 얽힌 큰 천에서 가운데 실이 빠진 것처럼 텅 비어서 식구들은 각자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처럼 힘들어한다. 와일드도 “이들의 삶은 구성원 하나하나가 서로 얽혀 짠 큰 천과 같아서, 그중 누군가를 잃으면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처럼 느낀다”라고 표현했다.




남은 이를 위한 ‘건강한 애도


서재 겸 거실에는 책탑을 쌓아놨다. 나는 이걸 ‘사별 큐레이션’이라 부른다. ⓒ티나의나무


추모와 애도. 이 둘은 닮은 것 같지만 사실 꽤 다르다. 추모는 고인을 기리는 데 초점을 둔다. 생전에 그분의 성품이 어떠했으며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의미 있고 소중한지 되새긴다. 애도는 고인의 부재에 집중한다. 사랑하는 이가 더 이상 곁에 없음으로 인해 유족들이,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끼는지 토로한다. 그리고 그 사실에 직면한다. 말로는 쉽지만 애도의 가장 마지막 단계, 그러니까 상실을 수용하고 직면하고 인정하는 과정은 결국 남은 이들이 견뎌야 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할머니를 추모하기에 앞서 내게는 깊은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나는 결론지었다.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더 이상 만지고 끌어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수용한 것 같은데, 제대로 직면하지는 못한 것 같다고 느껴서다. 마치 어디 먼 동네의 이야기를 듣고는 ‘아하, 그런 일이 어디서 일어났대’ 정도로 인식하고 ‘나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듯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할까.


내 일상에서 소중한 존재가 사라졌음을 맞닥뜨릴 때마다 놀라고 당황스럽고 허망하다. 장을 보러 가지 않는 건 할머니가 즐겨 드시던 간식들이 눈에 아른거리는 까닭이다. 주말에 부모님 댁에 갈 힘이 안 생기는 건 그곳에 할머니가 안 계시다는 생각을 회피하고 싶어서다. 퇴근길 휴대폰을 보지 않는 건 내게 매일 같은 시간 걸려오던 전화가 오지 않을 것이 두려워서다. 어질러진 집을 치우지 않는 건 정리 안 된 마음의 발현이다. 이 직면의 과정은 내 일상을 수십 바퀴쯤 돌리며 서서히 선명해질 것이다.


어떤 의식이 필요한 건 아닐까. 한 달쯤 고요한 곳에 틀어박혀 허기져 더는 울 힘이 없을 때까지 애곡하고 싶은 마음이다. 후회 없고 아쉬움 없는 이별이 어디 있겠냐 마는 시간을 12월 26일로 돌려 이별 직후 차가워져 가는 할머니를 인식하고, 장례 절차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지 말고 입관 전 조금이라도 할머니와 머무르며 수용의 절차를 마무리하고 싶다. 그랬다면 장지에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흔들 수 있지 않았을까.(물론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장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면, 병원이 아닌 요양원에서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뵈었던 12월 4일을 택하겠지만 말이다.)




죽음의 안식일, 아니눗과 시바, 실로심


너무도 위안이 되는 제목을 번역한 이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티나의나무


‘남은 이들을 위한 건강한 애도’는 나만의 신통한 아이디어가 아니다. 아마 또 다른 나(alter ego) 같은 옆 사람을 예기치 못하게 보내야만 했던 사람이라면 혼자 남은 시간을 고통 대신 추억으로 채우고 싶어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한 번쯤 고민했을 법하다. 지혜의 책 탈무드를 쓴 유대인들은 일찍이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한 뒤 자신을 건강하게 돌보려면 안식일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하나의 의식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애도의 기간이 ①아니눗, ②시바, ③실로심이다. 이 의식들은 그 역사만큼이나 정교하고 구체적이다.


아니눗은 죽음의 순간부터 매장의 시간까지를 말한다고 한다. 중동의 더운 기후 탓에 이들은 고인이 사망하면 24시간 안에 시신을 매장해야 하는데, 이 시간에는 ‘고인을 애도하며 죽음을 피부로 느낀다’고 한다. 한국 장례풍습 중 입관만 하더라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하루 만에 사랑하는 실체와 이별해야 하니 아니눗은 유족들에게 그야말로 고통의 시간이리라.


그다음 의식은 시신을 매장하고 난 뒤 일주일 동안 이뤄진다. 이 기간을 시바(Shiva)라 부른다. 시바에는 해야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명확하다. 일을 하거나 학교에 갈 수 없고 집을 떠나선 안 된다. 따라서 신발을 신지 못한다. 음악을 들어선 안 되고 부부관계도 금지한다. 오로지 침묵 속에서 상실을 마주할 뿐이다. 눈물을 흘리고 고인을 그리워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렇게 애곡하는 일주일을 보낸 뒤에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의식에 돌입한다. 바로 실로심(Shioshim)이다. 사흘(이 기간이 열두 달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 글은 길들여지지 않는 슬픔에 대하여의 저자 칼렙 와일드의 기술에 따랐다.동안 멈췄던 일상을 하나둘씩 회복하는 것이다.




 사랑의 깊이만큼 진한 치유의 시간


애도의 기간은 남은 이들을 위한 치유의 시간이기도 하다. ⓒ티나의나무



우리 가족은 유대인은 아니지만, 일상을 멈추고 죽음의 안식일을 지켰다. 나는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살아계셨을 때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나마 안식일이라는 긍정적이고 건강한 과정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욱 힘들었을 시간이 수월하게 지나갔다.

- 길들여지지 않는 슬픔에 대하여(칼렙 와일드) 중  -



총 열흘 간의 애도 기간의 핵심은 일상을 멈추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당한 슬픔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잘만 돌아가는 세상으로 며칠 만에 복귀하는 건 내면의 아픔을 치유하기 어렵다는 통찰로 이해됐다.


지난 한 달,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주체하기 어려웠다. 밥을 먹다가도, 머리를 감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느라 진땀을 뺐다. 나중엔 누가 보든 말든 나의 내면의 상태를 최우선에 두게 됐고, 턱끝에 맺힌 눈물을 이따금씩 걷어낼 뿐이었다. 가방엔 손수건만 서너 개. 내면은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안 됐는데 이성적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현실세계에 나 자신을 억지로 욱여넣으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서재 겸 거실에는 책탑을 쌓아뒀다. 나는 이걸 ‘사별 큐레이션’이라 부른다. 이 책의 저자들과 소통을 하노라면 누구보다 현재 내 마음 상태를 잘 아는 그들에게 위로를 얻는다. 그리고 내가 겪는 과정이 자연스러운 치유의 시간임을 알게 된다.


지난해 나보다 먼저 상실을 경험한 지인은 “얼마나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적정한 애도의 기간을 내게 물었다. 나는 그 때 “슬픔에 기한이 어디있어. 시기를 정해둔다고 마음이 괜찮아지겠어? 네 마음에만 집중해”라고 답했다. 이 대답은 지금 내게도 적용된다. 사회 통념과 내 슬픔의 깊이가 다르더라도 괜찮다. 나는, 당신은 지금 사랑의 깊이만큼 진한 치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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