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서 시작되는 행복
요즘의 트렌드는 모르겠지만,
나 때는(!) 엄마 손에 이끌려 피아노 학원 문지방을 넘는 어린이가 많았다.
나도 그 어린이 중 하나였다.
모두 거실에 나와 함께 자던 여름밤에는
엄마의 살랑살랑한 부채질에서 만들어지는 아주 얕은 바람과
머리맡에서 돌아가던 cd 플레이어,
잠드는 순간까지 귓가에 맴돌던 피아노 연주곡들이 아직도 생생한,
여기저기 곳곳에 스며들어 있던 음악.
아직 10살도 채 되지 않았던 1, 2학년 시절
의무적으로 채워야 하는 진도 카드의 동그라미가 미웠지만
그럼에도 피아노는 꽤 재밌었다.
집에는 녹록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마련해 주신 피아노 한 대가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6학년 때는 어느 작은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엄마는 이제 중학생이 되면 공부를 하는 편이 좋겠다고,
피아노로는 먹고살기 어려우니 우선 공부를 하고, 커서 직장을 갖고 나서 취미로 다시 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걸 아껴가며 한 푼 두 푼 모아 사준 피아노를 이제 그만 하자는 말을,
그 말을 어쩔 수 없이 꺼내는 엄마는... 아주 괴로웠을 것 같아 마음이 저려온다.
철없던 나는
그 무렵이 하필 컴퓨터가 보급되던 시절이라 컴퓨터 타령을 했고,
피아노를 팔면 사줄 수 있다고,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말에 컴퓨터를 선택했다.
나의 친구 피아노는 그렇게 우리 집을 떠났다.
마음속 아주 깊숙한 곳에 넣어둔 어린 시절 꿈은 어둠 속에서 한 번씩 반짝였다.
하지만 마음을 돌볼 여유가 없어 그 빛을 발견하지 못한 채 수 십 년이 지나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기로 결심했던 어느 날.
나는 그제야, 서른이 넘어서야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고
깊이 묻어두었던 꿈을 찾았다. 가슴이 뜨겁게 떨렸다.
근처의 성인 피아노 학원을 찾았다.
오랜만에 들어간 연습실 방음벽은 새까만 계란판이 아닌 베이지색으로 예쁘게 둘러져있었다.
다시 만난 피아노. 반가웠고, 동시에 서먹했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손가락이 다 굳었을 게 뻔했고
악보 읽는 것도 전부 기억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선생님께 그냥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달라고 말씀드렸고,
성인용 바이엘로 첫 수업을 시작했다.
흐려진 기억을 차근차근 더듬어 가고
얼어버린 손가락도 건반을 더듬더듬
신기하게도 거의 20년이 다돼 가도록 피아노 앞에 앉아본 적이 없었는데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악보를 따라가는 눈도, 손가락도 속도가 붙었다.
토요일은 레슨을 받는 날이다.
레슨 받기 전에 연습하지 않으면 레슨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집에서 연습하기 위한 디지털 피아노를 장만했고,
평일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피아노 앞에 앉는다.
수영을 시작하기 전에는 거의 매일 저녁을 피아노에 쏟았고,
지금은 수영 강습일을 제외하고 연습하고 있다.
퇴근 후 피곤하고 귀찮아도, 연습 안 하는 텀이 길어지면 다시 둔해지는 것을 알기에, '한 번이라도 쳐보기'로 습관을 들였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확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당시에는 분명 '오, 이 정도면 꽤 괜찮군.'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그때의 녹음본을 다시 들으면 웃음만 난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이 곡을 치는 날이 올까, 싶었던 어려워 보였던 곡들을 도장 깨기 하며 완주해나가고 있다.
피아노와 함께하는 인생 시즌4의 여정을 보내며,
수강생들끼리 모여하는 몇 번의 연주회도 경험하며
그 속에서 음악뿐만 아니라 내 삶에 녹아드는 많은 것을 배웠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된 나의 친구는,
나이만 먹고 아직 어른이 덜 된 것 같은 내게 아직도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