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 해고 극복기
"잠깐 엄마랑 얘기 좀 할까?"
모처럼 일찍 집에 온 날이었다.
반년 째 막살고 있는 딸을 그래도 뒤에서 믿고 기다려준 엄마인데 드디어 한계에 다다르신 걸까,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어? 어..."
엄마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뉴질랜드 가볼래?"
고삐 풀린 망아지 귀가 번쩍 뜨였다.
"갑자기? 돈이 어디 있어..."
"어학원 3개월은 보내줄 수 있어. 그 이후는 못 도와주니까 힘들면 3개월 후에 돌아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분명한 것은 떠나고 싶었다.
그곳은 얼마나 먼지, 어떤 곳인지 아무것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오랜 비행 끝에 도착한 남반구.
파란 하늘을 한가득 채운 구름들이 아직도 생생해 가슴 떨린다.
그렇게 스무 살의 해가 저물어갈 무렵, 용감하게 지구 반대편에 홀로 섰다.
가슴을 부풀려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청량한 낯선 공기가 온몸 곳곳에 스며들었다.
엄마는 한 푼 두 푼 모은 소중한 3개월의 생활비를 쥐어주었다.
내 비자로는 최대 1년까지 체류가 가능하다고 했다.
어떻게든 이 사랑스러운 도시에서 1년을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어학원을 다니던 날들은 즐겁게 지나갔다.
거의 2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이어가는 소중한 인연도 그곳에서 만났다.
줄어들어가는 통장 잔고를 수시로 확인하며 언제까지나 이 행복이 이어질 수 없음을 상기했다.
무작정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점심 도시락 판매가 주력인 초밥집이었다.
이른 아침 혼자 가게 문을 열고 밥 짓기부터 시작해 꽤 많은 초밥을 만들어야 했다.
아무리 틀에 찍어 내는 거라 하더라도
내 식사도 제대로 못 챙기는,
아직 만 나이 19살짜리에게 하루 물량을 시간 내에 완벽히 만들어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5일째, 사장님은 멋쩍게 작별을 선고했다.
사회에서의 첫 실패였다.
직감했던 일임에도 막상 닥치니 무너졌다.
하지만 절망할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
나는 내게 물었다.
"포기할 거야?"
곧바로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뉴질랜드에서 케밥 만들며 사는 삶.
꿈도 꿔보지 못한 일이 예기치 못하게 눈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결국 나는 원했던 대로 1년을 꽉 채워 살았다.
부족한 나를 많이 이해해 주셨던 케밥집 사장님은 꼭 다시 오라며 따뜻한 인사를 건네주셨다.
정착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닿지 않아 돌아와야 했다.
슬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고, 영어를 복수 전공했다.
나는 이후 10년을 영어로 먹고살 수 있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그 시절,
해가 지면 문을 닫는 가게들,
밤마다 공부하는 외국인 룸메이트.
마음 편히 앉을 곳은 책상 밖에 없었다.
나는 밤마다 영어로 일기를 썼다.
처음에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쓸 수 없어 답답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써 보았다.
어차피 남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며칠, 몇 주, 몇 달 후에 전에 쓴 일기를 보면 틀린 말들이 눈에 들어왔다.
격려해주고 싶은 말들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의 나를 미래의 내가 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안아주었다.
그 해의 마지막 날, 창 밖의 요란한 축제 소리 가운데 나는 여전히 책상에 앉았다.
소주 한 병과 일기장과 펜, 그리고 나.
고독한 순간을 보내봐야 진정한 어른이 될 것 같았다.
이 날 마신 목구멍을 타들어가는 쓴 맛은 잊을 수 없다.
나는 충분히 고독했고, 일기장만이 친구가 되어 나를 담담하게 받아주었다.
일기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
계절을 반대로 맞이하는 곳에서 나는 앞으로
내 몸 하나는 어떻게든 책임져야겠다는 결심,
그리고 어떻게든 책임질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