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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김서령 Jun 26. 2023

라일락 꽃이 피었습니다

은규를 떠올려본 건 오랜만이었다. 시각디자인학과 수석 입학생이었으나 입학 후 단 한 장의 그림도 그리지 않은 강은규. 대신 은규는 노트북을 끼고 다녔다. 작가가 될 거라고 했다. 

“작가가 될 거라면 뭐 하러 미대엘 왔어?”

동기들이 물으면,

“미대 출신 작가, 멋있잖아.”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대답을 했다. 이상한 신입생이 틀림없었다. 글을 본 적 없어 정말 글을 잘 쓰는지는 알 도리 없었으나 연애 하나는 끝내주게 해치웠다. 지윤이 졸업을 할 때까지 은규는 그림 한 장 그리지 않았으므로 전 과목 F 학점이었고 당연히 시간이 많았다. 시간이 많아서 많은 남자를 만났고 남자친구들의 전공과 성향은 몹시 다양했다. 수법도 가리지 않아서 양다리와 원나잇, 가로채기 등등 모든 것에 능숙했다. 동기들이 졸업을 앞두고 이곳저곳 취업을 할 때, 저 애는 그냥 저렇게 인생을 망치려는 건가 수군대며 친구들은 은규를 걱정했다. 하지만 쓰잘머리 없는 걱정이었다. 은규는 공모전에서 수상하며 드라마 작가로 데뷔했다. 

“쟤가 뭘 하고 있긴 했어!”

그야말로 벙찔 지경이었다. 은규는 쑥쑥 성장했다. 단막 드라마 몇 편을 거쳐 장편 드라마로 진출했고, 우리 학과 출신 중에서는 제일가는 유명 인사로 단박 올라섰다. 무슨 제목이 이렇게까지 촌스러운가 싶었던 월화드라마 《라일락이 피었다》는 청년 세대부터 중장년층까지 시청자를 끌어모으며 마지막 화 시청률 42%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다. 지윤 역시 수건을 가져다 두고 펑펑 울며 마지막 화를 보았다. 

그게 강은규 나이 스물일곱 때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신참 딱지 못 뗀 동기들이 여기저기서 헤맬 때 은규는 이미 스타 작가였다.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다 펼친 잡지에서도, 인터넷 기사 검색에서도 은규를 볼 수 있었다. 연예인들의 공항패션 사진 속에서 은규의 모습을 발견했을 땐 지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엄청난 계약금을 받고 아일랜드로 집필 여행을 떠난다는 기사 속 은규는 트레이닝 반바지 차림이었다. 노란 발목 양말에 흰 나이키 운동화가 희한하게도 예뻐 보이는, 정말 이상한 애였다. 실제로는 주근깨투성이 하나도 예쁘지 않은 아이인데.

하지만 아일랜드에서 은규는 대본을 한 장도 써오지 못했다. 귀국한 이후에도 은규는 쓰지 않았다. 바로 H 때문이었다. 

잘생겨도 너무 잘생긴 남자였다, H는. 

CF모델이었다가 배우로 전향한 H는 데뷔 후 열두 편의 영화를 찍었고, 모조리 흥행에 실패했지만 잘생겨도 너무 잘생긴 얼굴 때문에 여전히 톱배우였다. 그가 입을 열지 않는 영화 속 장면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비평가들이 제발 저 혀 짧은 배우를 눈앞에서 치워 달라고 거칠게 펜을 휘갈겼지만 한국의 여성 관객들이 H를 한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감독들은 계속 그를 캐스팅했다. 조금이라도 욕을 덜 먹기 위해 H의 대사를 극도로 줄이면 영화는 당연히 지루해졌고, H에게 갈 시선을 덜기 위해 투톱으로 가려고 하면 상대 남자배우가 거부했다. H와 한 화면에 잡히고도 자신만만할 수 있는 남자배우란 사실 한국에 없다고 봐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드라마였는데, 한국에서는 연기력 논란이니 어쩌니 해도 중국에 던지면 괜찮았다. 더빙을 해놓으면 연기력 따위 분간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H는 은규의 드라마 《라일락이 피었다》의 주연배우였다.      

아일랜드로 떠난 지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원고 한 장을 주지 않는 은규 때문에 열이 오를 대로 오른 감독이 잡지 기자 앞에서 울분을 터뜨리며 내보인 이메일 한 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은규가 감독에게 보낸 딱 두 줄짜리 메일이었다.

‘더는 글을 못 쓰겠어요.

당분간은 사랑에 집중하고 싶거든요.’

기자는 이메일을 기사에 그대로 내보냈고 사람들은 은규의 배포에 오히려 감탄했다. 아일랜드 남자와 사랑에 빠졌겠지! 어떻게 하면 다 던지고 사랑만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은규에게 환호할 때 이 머저리 같은 은규는 제 블로그에다 사진 한 장을 떡 올려버렸다. 한 남자와 입맞춤을 하는 셀피였다. 팔을 쭉 뻗어 카메라 각도를 잘 맞춘 탓에 남자의 모습은 사진 안에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 남자가 H라는 것을 순식간에 눈치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H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콧대 반쪽, 아랫입술 약간 보였을 뿐인데도 H를 알아본 사람들은 야단이 났고, 기자들은 기어이 H의 아일랜드 출국 기록을 찾아냈다. H는 곧 귀국했고 기자들 앞에서 평소처럼 말 없는 미소만 보인 뒤 유유히 사라졌다. 은규는 한국 여성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다. 감히 H를 너 따위가! 

은규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5년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은규는 중국이며 베트남, 미국과 브라질, 알래스카까지 떠돌다 돌아온 참이었다. 주영과 만나기로 한 맥줏집에 먼저 와 마른오징어를 씹고 있는 은규를 보던 날, 지윤은 그저 웃었다. 웃겼다. 저 키 작고 예쁘지도 않은 주근깨투성이 아이가 무려 H를! 

아주 소식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H와의 입맞춤 사진을 겁도 없이 올린 것처럼 은규는 사람들이 잊을 만하면 또 비슷한 짓을 저질렀다. 

‘내 인생을 변화시킬 사람을 여기서 만나다니요.

여긴 몰타, 아주 작은 섬나라랍니다.’

‘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은, 쌍권총을 쏘는 마리아를

바로 이곳, 연해주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처럼 지금 저도, 사랑 중입니다.’

“뭐래는 거니, 정말.”

“또 돈 거지, 뭐.”

주영과 지윤은 가십 기사에 종종 오르내리는 은규를 이야기하며 키득거리곤 했다. 

“얘는 한 번 돌면 정말 정신을 못 차리더라.”

“지 팔자 지가 꼬는 거지. 그 좋은 작가 자리도 다 팽개치고. 하여튼 돌았어.”

그런 은규가 배시시 웃으며 마른오징어를 쭉쭉 찢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약혼한 남자와 끝내 결별하고 귀국한 길이라 했다. 몰타에서 만난 남자나 연해주에서 만난 남자, 네덜란드에서 만난 남자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오직 H와의 사연이 궁금해서 지윤과 주영은 캐물었지만 은규는 얄밉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은규는 다시 어디론가 떠났고 잊을 만하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뉴질랜드에서 정신 나간 연애담을 블로그에 올렸다. 더는 그것을 기사화하는 기자도 없었다. 그런 은규가 지금 한국에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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