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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작가 May 16. 2019

시들어도 꽃이다!

반가운 전화

"여보세요?"

"새~앰! 오랜만이죠?"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다이어트에 극적인 성공을 이루고 웨딩 드레스를 입은 그녀. 이제는 생후 20개월이 넘은 딸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평생 해오던 다이어트건만 늘 실패가 끊이지 않았는데. 결혼 적령기가 서서히 넘어가자 독하게 마음을 먹고 병원, 한의원, 운동 등 물질 문명의 도움과 독한 의지로 예쁜 원피스를 입기 시작한 사람.


예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 아이 엄마가 된 그녀의 목소리가 울먹이듯 울컥하는 것 같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넘어가는 소리로 할 말을 쏟아놓는다. 육아에 치여 한동안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고 스트레스로 살만 더 찐다는 사연 같다. 하지만 그런 말이 아니었다.

"이제 어린이집 보내고 있어요."


원장샘이 나를 닮았단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 그 모습일 듯 하단다. 조곤조곤 말하는 모양. 마른 체형. 안경 쓴 얼굴 등 나를 연상시켜 생각이 더 났다고. 그래서 한번 보잔다. 아무렴! 보구 말구요. 동생도 스쳐간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자기를 주장할 일이 적어진다. 시댁도 챙겨야 하고 애들도 키워야 하고 집안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래서 취미생활이 쉽지 않고 누군가에게 자기 목소리를 들려주는 게 참 특별한 일이 된다. 그 모든 것이 갑자기 서글프다. 처녀인 내가 그들의 심정을 오롯이 알까마는 그래도 맘 아프다.


좋은 기억만 더 가득하겠지. 얼마 전 유산을 했다는 그녀의 말에 할 말이 없다. 너무 힘들어서 둘째는 안 가진다더니 뜻밖에 생긴 녀석이 유전적 이상이 있던 모양이다. 자연 유산을 했단다. 내가 뭘 아랴. 그래도 내 말을 귀하게 들을 줄 아는 넓은 마음과 귀가 있는 사람이라 존경스럽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몸은 괜찮아요?"

오가는 안부와 인사. 결혼과 육아에 문외한인 나를, 조카보기가 전부인 나를 그래도 책 좀 읽는다고 교양인 취급해주며 추어준다. 샘은 책을 읽어 그런지 이해심이 크네요, 그런다. 조금은 맞고 많이 그르다. 이해심이 큰 척 하며 살고 싶은데 인간의 그릇을 키우는 일은 고생 없이 불가능하다. 그냥 크는 게 아니니까.


나를 추어주는 말보다 폭포수처럼 쏟아놓을 정도로 세상에 나오고 싶은 그녀가 안쓰러워 잠시 울컥한다. 그러다 시선이 머무는 곳. 탁자 위 마른 장미. 평소 꽃을 좋아하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꽃은 말려서 오래도록 보기도 한다. 선물 받은 꽃을 빨래집게에 꽂아 그늘에서 정성껏 말려준다. 이것은 동생에게 배운 비법이다. 어느 날 지인의 결혼식에서 받은 부케-받은 지 6개월이 훨씬 지나 여태 이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를 본 동생이 어디서 배웠다고 플로리스트 흉내낸 걸 보았다.

꽃다발 해체 과정

꽃다발을 푼다. 한 송이씩 배열하여 키를 맞춘다. 가위로 조금씩 다듬어 하나 하나 말려준다. 실을 엮어 여러 송이로 말릴 수도 있고 하나씩 말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조금 더디다. 꽃도 어떻게 말리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흔히 꽃을 말릴 때,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하라고 하는 게 이유가 있다. 성격 급한 나는 말리다가 얼른 완성된 모양을 보고 싶어 그냥 병에 담아버렸다. 그랬더니 고개가 숙여지는 거다. 분명 뿌리가 없는, 생명이 꺼져가는 장미인데. 완전히 말리지 않은 꽃은 말라가면서도 고개를 숙이고 잎이 벌어진다. 그래서 힘없이 고개숙인 장미가 되어버린다.


오월이다. 빌라 담벼락 주변, 어느 집안 대문 위 울타리. 곳곳에 장미가 흔하다. 바람에 나부껴 흔들리는 모양이 반갑게 인사하며 손짓하는 것 같아 사랑스럽다. 계절의 여왕, 장미가 지천인 절기에 시집가서 애 낳고 일하고 바쁘게 사는 동생이 아니더라도 이 땅의 장미처럼 시들어가는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 괜히 신경이 쓰인다. 얼마 전에 읽은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에 나오는 이 빠진 여성과 콜탄의 좁은 갱도에서 질식해 죽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아이들. 그들이 고개 숙여 말라가는 장미같아 마음이 뜨끔하다.


꽃을 보면 우울함이 사라지지만 꽃을 보니, 가엾은 누군가가 연상되어 다시 슬퍼지기도 하는 인생이다. 그들이 시들어가도 꽃인데,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생명인데. 꽃을 보며 감상에 빠지는 내 모습이 하루하루를 죽음보다 못한 고통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하여 인생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시든 꽃도 꽃이기에. 누군가는 기억해서 같이 살아가는 법을 모색해야 한다.

반가운 전화 한 통.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기에 오늘 내가 한 송이 장미로 화사한 웃음을 선사해주고 싶다. 특별히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값지게 쓰여지는 미소라면 더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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