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뭐야?
라는 질문을 듣고 한지 오래됐다. 최근에 한 번 듣기는 했지만 마지막으로 내가 물은 게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아니면 대학신입생 시절이겠거니 하고 짐작할 뿐이다.
“꿈이 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들은 건 중/고등학교 때다. 한창 비전 열풍이 불었던 그 당시 교회 주일학교에서는 자주 꿈과 비전을 이야기했다. 그때마다 전도사님이나 선생님들은 꿈이나 비전은 직업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직업’이라는 명사를 ‘훗날 무엇이 될 거냐’ 혹은 ‘어떤 일을 할 거냐’는 문장으로 바꾸는 것 정도로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꿈은 내게서 저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잡히지 않는, 정체를 모르겠는 단어다. 오래 알았지만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어색한 친구 같다.
나는 꿈과 짝지어 다니는 낭만이 부담스럽다. 어떤 성취나 완성을 내포하는 표현으로 들려서 매력도 반감된다. ‘꿈을 꾸다’, ‘꿈을 이루다’처럼 꿈이라는 명사가 어떤 동사와 함께 쓰이는지만 봐도 그렇다.
내가 무엇이 되어도 삶은 계속되는데 마치 꿈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꿈이라는 목적이 있고, 그것을 실현해야만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도 거북하다.
‘꿈이 되지 못하는 삶’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어린 시절에 꿈을 생각해 보고 이야기하지만 누구도 “나는 커서 회사원이 될 거야”라든가 “청소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하지 않는다. 만약 있다 해도 주변에서 이를 자연스럽게 여기지 않고 이유를 물어볼 것이다. 작고 초라한 것과 꿈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분명히 존재하지만 ‘꿈’이라는 영역에는 포함되지 않는 어떤 삶. 과연 꿈은 삶을 이야기 하기에 충분한가.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나는 차라리 이렇게 묻고 싶다. 꿈이라는 ‘내용’ 대신 어떤 내용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서.
내용은 삶을 제한하지만 태도는 삶의 다양하고 복잡한 면면을 껴안는다. 지금 내 삶과 분리된, 아직 오지 않은 어떤 이상을 말하는 게 ‘꿈’이라면 “어떻게 살고 싶냐”는 말은 그보다 가까이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들린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아닌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쌓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이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계속 흐르는 것처럼.